성장률 3% 안팎으로 곤두박질, 고군분투하던 수출마저 주춤기업들의 경쟁력이 희망, 정치논리 벗어난 경제정책 수립 절실

저성장 덫에 걸린 한국경제 돌파구는 없나
성장률 3% 안팎으로 곤두박질, 고군분투하던 수출마저 주춤
기업들의 경쟁력이 희망, 정치논리 벗어난 경제정책 수립 절실


과천 정부종합청사 1동 건물. 이 곳에는 한국의 경제 정책을 집도하는 재정경제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행정고시를 수석 합격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답게 이 곳 관료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왔다. 그런데 요즘 이들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 그늘이 번지고 있다.

재무 관료 생활만 25년 가까이 해온 한 1급 간부. 그는 30분 넘게 한국 경제의 실상에 대해 근심어린 발언을 쏟아냈다.

“우리 경제가 왜 이리 죽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 해답이 안 나와. 정말 저성장의 덫에 빠져 있는 걸까.”

일본식 장기불황 경고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이후 한국 경제는 초유의 실험을 이어왔다. 비단 기업과 금융부분의 구조조정 뿐 아니다. 한 국가의 경제 체력을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도 개발 시대 이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해 왔다.

2002년 7%라는 기적적인 성장률로부터 2005년 1ㆍ4분기 2.7%로 곤두박질치기까지 성장의 부침은 계속됐다. 그런 와중에도 “한국 경제는 건실하다”는 관료들의 발언은 주문처럼 이어졌고, ‘성장률 5%’는 무너질 수 없는 성역으로 자리잡았다.

2005년 지금, 그 등식이 깨지고 있다. 우리의 경제 주체들은 “5%는 영원한가”라는 자조(自嘲) 섞인 회의감에 빠져 있다. 2004년 한해 더블딥(경기가 일시 상승후 다시 하강하는 현상)이라는 신(新) 경제학적 용어의 시험무대가 됐던 한국 경제는 이번에는 ‘L자형 장기 침체’라는 무서운 불황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1ㆍ4분기 GDP 성장률이 2.7%까지 고꾸라진데 이어 2ㆍ4분기에도 극적인 반전이 없는 한 3% 안팎의 성장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급기야 경제 수장인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5월30일 올해 5% 성장률 달성이 힘들다는 것을 인정했고, 열린우리당 워크숍에 가서는 일본식의 장기 불황에 빠져 들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내놓기도 했다.

10년 넘는 불황 속에서 ‘잃어버린 세월’을 보냈던 일본의 경험을 우리가 답습해야 한다니…. 불과 한달 전까지도 “5% 성장률 달성을 포기할 단계가 아니다”고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경제 수장이 아니었던가.

불행하게도 부총리의 발언에, 그가 어떤 목적으로 말을 했든, 시장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리 경제는 그의 발언을 무감각하게 흘려 버려야 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을까.

우선 최근 나온 속보 지표들을 들여다 보자.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을 이끄는 양대 엔진은 수출과 내수다. 지난해 우리 경제는 4.7%의 성장률을 달성하면서 수출을 유일 엔진으로 삼아 왔다. 성장의 90%를 수출이 차지할 정도로 수출은 한국 경제를 외끌이했다. 그 속에서 죽을 쓰는 내수의 모습은 희석됐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 4월 월간 수출 증가율은 6.9%. 현실화할 것으로 아무도 믿지 않았던 한자릿수 수출 증가율은 속절없이 우리 경제의 현실로 다가왔다. 수출이 꺾이다보니 이번에는 경상 수지 적자라는 우울한 결과가 몰려 왔다. 2년만에 처음 겪는 경상적자. 정부와 한국은행은 외국인들에 대한 배당금을 너무 많이 줘서 적자가 발생한 것일 뿐이라며 애써 자위했지만, 이는 수출 둔화라는 현실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경제정책 리더십 실종
그렇다면 내수는 어떤가. 통계청이 한 달에 한 번씩 내놓는 산업활동 동향에서 가장 유의성이 있는 지표 두개가 있다. 하나는 경기 선행지수이고, 나머지 하나가 동향지수다. 전자는 6개월 후의 경기 흐름을, 후자는 현재의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가늠자다.

지난 4월 산업활동이 나올 당시만 해도 우리는 부진한 지표 속에서도 조금의 위안을 삼았다. 경기 선행지수가 오름세를 계속해 하반기에는 분명히 경기가 살아날 것이란 기대때문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이 같은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4개월만에 내림세로 꺾인 선행지수, 여기에 동행지수도 한 달 만에 다시 내리막길로 돌아섰다. 경제 수장으로서는 올 5%의 성장 목표를 포기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색 경보등이 켜진 한국 경제. 이를 돌파할 카드는 없는 것일까. 우리 국민들은 이제 우리 경제가 3% 안팎의 저성장에서 탈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을 부인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도리어 앞으로 수십년 후면 이른바 초고령 사회로 바뀌어 젊은 사람 1명이 노인 3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암울한 시나리오에 참담함만 느낄 뿐.

현실 속에 드리워진 경제 정책의 운용 행태도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정부는 지난해 침체에 빠진 우리 경제를 살릴 회심의 작품이라며 이른바 ‘한국판 뉴딜’이라는 단어를 등용했다. 7조~10조원 규모의 종합투자계획을 통해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한국 경제의 중장기 잠재 성장률을 4.8%~5.2%로 유지시키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내세웠다. 전임 이헌재 경제 부총리는 전국에 골프장 250개를 만들어 중국 관광객들을 유치하겠다며 그 일환으로 일면 ‘J프로젝트’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경부 고속철 천성산 터널 공사와 새만금 간척사업에서 보듯이 대형 국책사업은 환경 단체 등의 힘의 논리에 휘말려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10조원을 투입하겠다던 뉴딜은 올 한해 1조원을 조금 넘는 집행 실적으로 ‘스몰 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뿐인가.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LG필립스LCD의 파주 공장 건설이 질척거리는 등 수조 원의 민간 투자가 공중에 떠버렸다. 부동산 세제는 경제ㆍ정치논리가 뒤범벅되면서 냉온탕식 정책을 거듭, 소비 의욕을 퇴색시키는 핵심 도구로 전락했다.

사정이 이러니 시장에서는 경제 정책의 리더십이 실종됐다는 극단적인 단어가 아주 평범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컨트롤타워가 사라졌다”는 또 하나의 우울한 문장이 경제 분석 리포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한 ‘전가의 보도’로 돼 버린 추가경정예산을 국가 빚을 추가로 내서 다시 발행하겠다고 나섰지만, 추경이 과연 경제 성장률을 얼마나 끌어올릴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진정으로 없는 것일까. 다행히도 희망의 빛은 아직 살아 있다. 단초는 바로 ‘진보’라는 얼굴을 가진 일부의 사람들이 그토록 욕하는 우리의 기업들에게 있다. 외국을 한번 돌아보고 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내에서 우울했던 마음이 해외를 돌고 나면 싹 가신다고. ” 오죽하면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 “기업이 애국자”라는 말이 절로 나왔을까.

우리 기업들은 지금 세계 시장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분전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LCD(액정표시장치)와 휴대폰 등도 세계 시장의 점유율 1~3위를 차지하며 독보적 지위를 이어가고 있다. 싸구려 제품 취급을 받던 미국에서 조차, 삼성이 가전 매장의 중심을 차지하고 현대자동차가 우수 디자인으로 꼽히는 등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출 증가율이 둔화하고 있다고 하지만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세계 경제가 둔화되는데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작용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역으로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 언제든 우리의 수출이 다시 고공행진을 할 수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물론 희망의 줄기를 잇기 위해 해야 할 전제 조건은 있다. 그 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치 논리를 과감하게 벗어 던진 경제 정책, 기업을 감성적인 흐름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비판의 잣대로만 보는 의식, 이 속에서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경제적 니힐리즘(허무주의)’, 이를 과감하게 허물어뜨리는 작업은 당장이라도 우리가 갖춰야 할 경제주체로서의 덕목이다. 수출과 내수의 고리 단절 등의 딱딱한 등식은 이런 적극적 동기 부여만 주어 진다면 아무런 효용성을 갖지 못하는 경제적 함수일뿐이다.


서울경제 경제부 김영기기자


입력시간 : 2005-06-08 19:42


서울경제 경제부 김영기기자 yo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