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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기업 한국화 "눈에 띄네"
전통 문화 지킴이 자처 현지화 전략, 한국기업보다 더 토착적



진로발렌타인스 임페리얼 장학금 전달식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서양 격언은 오늘날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의 하나다.

어느 나라에 진출하든 그 나라의 고유한 법과 제도, 문화와 국민성 등을 간과해서는 이윤 창출은 고사하고 기업 활동 자체가 여의치 않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에 현재 지구촌을 무대로 활동하는 대다수 다국적 기업들은 국제적 규범을 준수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물론, 토착화ㆍ현지화(localization)를 시장 공략의 필수 전략으로 삼고 있다.

국내 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과거처럼 제품력과 브랜드만으로는 돈을 벌기 어려워진 상황을 깨달은 이들 기업은 한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그 중에는 여간해서는 떠올리기 힘든 독특한 발상도 종종 눈에 띄는데, 한국 전통 문화 유산의 지킴이 역할을 자처하는 기업들의 예가 특히 그렇다.

이들은 외국계 기업으로는 보기 드물게 잊혀져 가는 우리의 자랑거리를 보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한국 기업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한다는 기업 이미지를 심고 있다.

디아지오코리아, 수벽치기 보존에 선봉



서울 강남구 역삼동 상록회관 뒤편의 한 5층 건물.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이 건물 5층에 직장인 10여명이 모여든다.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 이들은 먼저 바닥에 앉아 자신의 다리, 배, 옆구리, 가슴 등 몸 구석 구석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긴다.

기(氣)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동작이다. 이들은 윈저, 딤플 등의 브랜드로 유명한 위스키 업체 디아지오코리아의 임직원들로 전통 무예인 ‘수벽치기’를 연마하는 중이다.



디아지오코리아 수벽치기 연수원 수련 장면

수벽치기는 택견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 고유의 전통 무예다. 고려시대에는 수박, 조선시대에는 수벽타, 수벽치기, 손뼉치기 등으로 불렸다. 주로 손쓰기 기술을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이런 명칭들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역사가 1,000년에 이를 정도로 깊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극소수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이 이어져 왔을 만큼 사멸 위기를 겪었다.

디아지오코리아가 토착화 노력의 하나로 수벽치기 복원 사업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이 회사는 우선 2003년 2월 역삼동에 ‘수벽치기 연수원’을 열었다. 사람들에게 수벽치기를 제대로 알리고 전수하기 위해서는 전용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임대료, 시설비, 교육자 초빙 등에 3억원의 돈을 들였다.

임직원들도 자발적으로 사내 동호회를 결성하는 등 적극 동참했다. 수벽치기는 신체 단련뿐 아니라 정신 수련법으로도 탁월하기 때문에 얻는 것도 많았다.

동호회원들은 “잦은 술자리와 흡연으로 지쳤던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거나 “업무에 임하는 태도가 더욱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며 수벽치기를 예찬한다.

디아지오코리아는 수벽치기의 보급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저 명맥 보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연마하고 즐기도록 대중화하려는 것이다.

2003년 10월 수벽치기 가이드북을 펴낸 데 이어 2004년 2월에는 수벽치기의 집대성 판인 ‘수벽치기 맨손 검술’을 출간했다.

올해부터는 사업 반경을 더욱 넓혔다. 젊은이들을 수벽치기 지킴이로 양성하기 위해 ‘대학생 수벽치기 캠프’를 지난 1월과 7월 두 차례 열었다.

앞으로 이 캠프는 연례 행사로 자리잡을 예정이다. 그 동안 각종 단체와 동호회 중심으로 개방해 온 수벽치기 연수원도 일반인 대상의 12주 단위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보급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아지오코리아가 펼치는 수벽치기 복원 사업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무까지 도맡아 챙긴 주인공은 홍준의 PR팀장이다.

홍 팀장은 “외국계이면서 주류 기업이라는 이미지의 한계를 벗어나 한국과 한국의 전통 문화를 사랑하는 기업임을 알리기 위해 사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도 로컬 마케팅 전략의 차원을 넘어 한국의 고유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전파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후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진로발렌타인스, 국악 영재 장학 사업



5년 전 어느 날 저녁 광주광역시의 한 식당. 벽안의 중년 신사가 식사를 하던 중 방 구석에 놓여진 장구를 발견했다.

이국에서 접한 낯선 모양의 물건. 그는 호기심이 생겨 여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 봤다.

여주인이 “예전에 판소리를 한가락 했다”며 장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자 외국인 신사는 내친 김에 한 곡조 뽑아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20여분에 걸친 즉석 판소리 공연. 이 신사는 여주인이 때로는 구성지게 때로는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방 안의 사람들이 가락에 맞춰 보여준 반응도 감동적이었다.

임페리얼, 발렌타인 등을 앞세워 국내 위스키 시장에서 디아지오코리아와 불꽃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진로발렌타인스의 데이비드 루카스 사장이 국악 사랑에 빠진 것은 이처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당시 한국에 갓 부임했던 루카스 사장은 한국 사회에 뭔가 보탬이 될 만한 일이 없나 궁리하던 터였는데, 마침 이 일을 겪고 난 뒤 한국의 전통 음악을 지원하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다.

판소리의 첫 경험이 얼마나 큰 울림을 줬는지 루카스 사장은 그 때의 느낌을 종종 “강렬한 감동”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이후 루카스 사장은 적당한 국악 지원 프로그램을 찾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이 곳에 모인 영재들을 후원해 국악의 미래에 불을 밝히자는 취지였다.

진로발렌타인스는 지난 2002년부터 매년 2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우수 신입생 2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 회사 임직원들도 외국인 사장의 ‘한국화’ 노력에 감화돼 장구나 단소를 배우는 등 국악 사랑 대열에 동참했다.

학생들의 연주회를 빼놓지 않고 참관해 오던 루카스 사장 역시 김성배 교장에게서 단소를 선물 받은 후 단소 연주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루카스 사장은 자신의 남다른 국악 사랑에 대해 “회사를 경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한국화’의 문제”라며 “국악과 같은 한국 문화 체험은 종업원과 소비자를 더욱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EMC, 직지심체요절 찾기 운동



정보 저장 장치 및 솔루션 제공 업체인 한국EMC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에 드높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ㆍ이하 직지)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직지에 대해 이 회사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0년이다.



한국 EMC 직지 마라톤 동호회

국내 시장 진출 5년째를 맞아 사회공헌 활동 프로그램을 찾던 한국EMC 경영진이 정보 자산을 저장ㆍ관리하는 자신들의 사업 내용과 ‘인류 기록문화의 상징’ 직지가 맥이 통한다는 데 착안해 직지 찾기를 후원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 초간본 상하 2권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하권 1책뿐이며, 그마저도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한국EMC가 그 동안 직지 찾기 운동 차원에서 벌여온 활동은 아주 다양하다. 첫 걸음을 뗀 2000년 한가위에는 청주 지역 귀성객을 대상으로 직지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일깨우는 홍보 책자를 배포했다.

2001년에는 뜻 있는 대학생들을 모아 ‘직지 동호회’ 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에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까지 직지 찾기 캠페인을 벌였다. 직지 관련 자료 전시회나 직지 동판을 이용한 고문서 인쇄 시연회, 영문 홍보 전단지 배포 등이 잇달아 이뤄졌다.

한국EMC는 시민 운동과도 보조를 맞춰 왔다. 2000년부터 충북 참여자치시민연대가 진행 중인 ‘전국민 직지찾기 운동’에 동참했는가 하면, 2001년부터 시작된 ‘청주직지축제’에는 공식 후원사로 활동하고 있다.

회사 일에 임직원湧?빠질 리가 없다. 한국EMC 임직원들은 2000년부터 직지 홍보를 위한 각종 캠페인 활동에 자긍심을 갖고 참여해 왔다.

사내에는 ‘직지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마라톤 동호회가 결성돼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이들은 직지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각종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직지 홍보 대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프랑스가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데 미온적인 점에 비춰 직지가 언제 우리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한국EMC 임직원들은 끝이 안 보이는 마라톤이 되더라도 계속 달린다는 다짐을 늘 간직하고 있다. 그 과정에 아름다운 뜻이 있기 때문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  


입력시간 : 2005-09-1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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