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 체제로 '환골탈태?'

9일 주식시장에서 두산그룹 주요 계열사의 주가는 상승세였다. 7월말 박용오 전 회장이 박용성 전 회장과 박용만 전 부회장 등 형제 일가의 비리를 검찰에 진정한 이후 4개월째 두산을 감싸온 짙은 먹구름이 어느 정도 가실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날 검찰은 두산 비자금 의혹 사건에 연루된 총수 일가 전원에 대해 불구속 기소 방침을 발표했다. 검찰은 “박용성 전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 동계 올림픽과 IOC 총회 유치 등 현안을 맡고 있다”며 “외교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인사를 구속 수사해서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은 국익에 심대한 손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두산 오너 형제들이 3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횡령한 혐의는 인정되지만, 핵심 피의자인 박용성 전 회장을 구속할 경우의 부작용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또 두산 사건이 통상적인 인지 수사에 의해 밝혀진 것이 아니라 형제간 재산 분쟁에서 비롯됐고, 박용성 전 회장 등이 혐의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한 점도 정상참작의 사유로 들었다.

검찰의 이번 결정과 관련해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박용성 전 회장 덕택에 다른 연루자들도 전부 불구속 혜택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비리의 정점에 있는 박 전 회장을 불구속하는 마당에 죄질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혐의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검찰이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형제의 난’에서 출발한 두산 비자금 의혹 사건은 결국 단 한 명의 구속자 없이 법원으로 넘어가게 됐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형제 간 우애가 손상된 오너 일가 입장에서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셈이다.

그렇다면 검찰의 ‘정치적 고려’ 덕택에 총수 형제들의 인신 구속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모면한 두산그룹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일단 시장에서는 회사의 투명성이 크게 높아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증시 분석가는 “향후 두산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 등 이전과는 다른 경영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며 “총수 일가가 불구속된 것은 그룹 개혁 과정이 추진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인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총수 일가가 두산그룹의 위기를 불러왔지만 이를 수습하는 데도 그들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전 회장 등 총수 일가의 ‘결자해지’ 의지는 외관상 강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박용성 전 회장과 박용만 전 부회장은 검찰의 불구속 발표가 있기 전인 4일 두산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

박 전 회장은 이날 긴급 사장단 회의에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경영 일선 및 모든 국내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히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과거의 낡은 관행과 단절하고 보다 투명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두산에 부여된 사회적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박 전 회장은 오너 체제의 공백을 메울 대안으로 ‘비상경영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계열사 사장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비상경영위원회가 그룹 전체 현안을 조율하는 한편 선진적 지배구조 확립 방안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비상경영위원회서 향후 진로 결정

박용만 전 두산그룹 부회장

재계에서는 유병택 ㈜두산 부회장이 위원장을 맡게 된 비상경영위원회가 향후 두산그룹의 진로를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1991년 ‘페놀 사태’로 창사 이래 최대 곤경에 몰렸던 두산그룹은 당시 박용곤 회장이 물러난 공백을 전문경영인 출신의 정수창 회장에게 맡겼는데, 정 회장은 이후 매끄러운 경영 능력으로 위기 상황을 잘 타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박 전 회장이 힘을 실어준 비상경영위원회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10일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 비상경영위원회는 우선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경영 확보를 양대 과제로 정하고, 위원회 아래에 별도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두산 주변에서는 비상경영위원회가 지주회사 체제의 도입이나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역할 강화 방안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족벌 경영의 폐단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강도 높은 개혁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 소유-공동 경영’의 원칙을 3대째 고수해온 두산 오너 일가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비상경영위원회는 말 그대로 한시적인 비상체제로만 임무를 다하고 이후에는 다시 오너 일가가 경영 전면에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활발한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그룹의 사업 구조를 ‘중후장대’형으로 바꾸는 등 제2의 도약을 이끌어온 박용성-용만 형제가 선뜻 경영에서 물러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에 근거한다.

때문에 비록 두 형제가 그룹 회장직과 부회장직을 내놓았지만 직ㆍ간접적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는 유지할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박용만 전 부회장은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산업개발 등 핵심 계열사를 계속 챙길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두산의 일부 관계자들도 박용성-용만 형제가 예전처럼 절대적인 영향력은 아니더라도 그룹 의사결정 과정에 일정한 발언권을 행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두산그룹이 비상경영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과도체제를 일정 기간 가동한 뒤 참신한 전문경영인을 회장으로 기용해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개선할 것이라는 예상도 내놓는다. 이번 사태로 인해 오너 3세 형제들이 입은 상처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감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전문경영인 체제가 뿌리내릴 것이라고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각 계열사에서 한창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오너 4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두산그룹은 4세 경영인들의 자질과 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시점에 ‘공동 소유-공동 경영’의 전통을 대물림 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물론 그에 앞서 추락한 그룹 이미지와 신뢰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선행될 것으로 보인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