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분야까지 중국산 제품 밀물…시장경제지위 부여로 공세 가속 우려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참석차 한국에 온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우리 정부가 16일 ‘시장경제지위’(Market Economy Status)라는 선물 보따리를 안겨줬다.

시장경제지위는 말 그대로 어떤 국가의 상품 가격 결정이 정부의 인위적 개입 없이 시장에서 자연스레 이뤄지는 상태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덤핑 수출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반(反)덤핑 조사를 할 때만 적용된다.

세계 각국은 덤핑율을 산정할 때 수출국의 국내 가격과 수출 제품 판매 가격을 비교하는데, 비(非)시장경제국가 제품의 경우에는 수출국의 국내 가격이 아닌 제3국의 가격을 적용해 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중국은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지만 2016년까지 비시장경제지위를 적용 받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이후 현재까지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호주 등 43개국이 중국의 시장경제지위를 인정하고 있지만 미국, EU(유럽연합), 일본 등 중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들은 여전히 이를 인정치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5대 교역국 중 하나인 한국으로부터 시장경제지위를 부여 받았다는 것은 중국으로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향후 비시장경제지위를 철폐해 나가는 데 일정한 디딤돌이 될 뿐만 아니라 당장 한국 시장에 대한 접근이 한결 용이해진다는 이점도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국내 산업과 기업의 일부 피해가 우려됨에도 중국의 위상을 띄워준 것은 반대 급부로 돌아올 실리를 고려했다는 설명이다.

대중 무역흑자 규모가 200억 달러에 이르는 데다 올해 연말이면 한ㆍ중 교역 1,000억 달러 시대가 열리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갈수록 긴밀해지는 터에 양국의 미래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라는 것이다.

중소기업 고유영역도 중국산 점유율 높아져

정부는 또 이번 조치가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1999년부터 중국에 대해 사실상의 시장경제제위를 인정해 온 데다 무역 마찰의 경우를 대비해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해 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산업계는 중국의 시장경제지위 획득에 바짝 긴장하며 향후 추이를 예의주시 하는 분위기다. 특히 중국산 제품의 저가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일부 업계의 우려는 더욱 크다.

이와 관련, 2년 전부터 중국과의 경제협력 관계를 크게 강화해 왔던 브라질의 사례는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브라질은 중국과의 교역 활성화로 공동 번영을 노렸지만 현실은 중국산 저가 제품의 브라질 시장 점령으로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2004년 11월 중국에 대해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한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현재 브라질은 중국산 섬유 제품의 수입 급증 등으로 자국 시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해결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수입상품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중국산 팬시상품을 고르고 있다. 조영호 기자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의 시장경제지위가 브라질의 반덤핑 규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웃 아르헨티나도 중국에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한 이후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대중 무역 불균형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한국 시장은 과연 중국에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해도 끄떡 없을 만큼 공고한 것일까. 상당수 기업들은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전망을 애써 믿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게 사실이다.

현재 국내 시장은 거의 모든 제품이 중국의 공세에 노출돼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 소비자들이 먹고 입고 사용하는 대부분 제품이 부지불식 간에 ‘메이드 인 차이나’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김치 파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먹거리는 ‘황사’에 휩쓸린 지 오래다. 농수산물은 물론이고 가공ㆍ포장 식품까지 중국산 제품은 싼 값을 무기로 아주 빠르게 한국 가정의 식탁을 공략해 나가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과자ㆍ스낵류에도 중국산이 침투하고 있다. 몇몇 제과업체가 원가가 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과자를 역수입해 시장에 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 일부 제품은 경쟁사 제품을 모방한 이른바 ‘미투’(Me Too) 상품이어서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이들 제품을 국산으로 알고 구입했던 소비자들은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들 중국산 과자류는 대기업의 중국 공장에서 생산돼 어느 정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지만, 생산자가 불분명한 제품도 상당량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져 식품 당국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대형 할인점이나 전문 유통업체 등을 통해 판매되는 각종 생활 잡화도 중국산이 기세등등한 분야다. 대부분 중소기업의 고유 영역이던 이 시장에 저가의 중국산 제품들이 물밀 듯 밀려 들어오면서 웬만한 국내 업체들은 줄줄이 문을 닫거나 업종 전환을 모색한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요즘엔 중국산 제품들의 품질도 썩 개선돼 비슷한 디자인과 기능이라면 값싼 중국산을 찾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에 맞춰 대형 할인점 등 일부 유통업체들은 중국산 제품 매입 비중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중국산 가전제품도 국내 시장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대기업들이 철수한 소형가전 시장에서 중국산과 국내 중소기업 제품들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TV, 냉장고, 세탁기 등 대형가전도 안심할 상황이 못 된다. 중국 가전업계 1위인 하이얼이 올 초부터 ‘초저가 정책’을 무기로 한국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삼성과 LG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있지만, 하이얼이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이다. 에어컨 등 일부 품목은 인터넷 쇼핑몰 등을 통해 제법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대기업들도 하이얼의 도전을 가볍게 여길 수만은 없다. 국산에 비해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과 함께 날로 향상되는 품질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하이얼의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 인수설이 제기돼 가전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만약 하이얼이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인수하게 된다면 삼성전자, LG전자와 함께 단숨에 국내 가전 3강에 뛰어오를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또한 고부가가치 프리미엄 가전제품 시장에서도 국내 양강에 강력한 도전을 해올 것이라는 예상이다.

중국산 자동차가 국내 도심을 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대우자동차판매가 중국의 칭링자동차와 소형트럭 수입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르면 내년 초부터 국산 트럭보다 10~20% 가량 싼 가격으로 국내에 선보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반 소비자들이 접하는 소비재뿐만 아니라 각종 원자재, 생산재 등에서도 중국산의 위력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섬유와 철강 등이 대표적인 분야다.

"중국 광천수로 만든 맥주 맛보세요" 중국 내몽고 지역의 지하 광천수로 만들어진 '징기스칸 맥주'가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에 출시, 고객이 시음을 하고 있다. 이진욱 기자

특히 국내 철강업체들은 올 들어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밀물처럼 들어오면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그 여파로 포스코 같은 일류 철강회사까지 고급 제품 분야의 비중을 늘리는 등 사업 구조조정을 선언했을 정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국내 시장의 중국산 점유율을 의미하는 ‘중국산 수입 침투율’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2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저기술(음식료, 섬유, 의복 등) 분야뿐 아니라 중기술(석유화학, 자동차, 의료기기 등), 고기술(전자, 항공기, 컴퓨터, 통신장비 등)에서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제품 기술력도 급성장 추세

이 같은 지표는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단순한 저가 제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첨단 제품의 기술력에서도 급신장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까딱하다간 한국 경제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의 추격에 뒷덜미를 잡힐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KDI는 긍정적인 측면도 지적했다. 먼저 저기술 분야의 수입 증가는 비교우위를 상실한 부문이 자연스레 구조조정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민간은 가용 자원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집중해 새로운 동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고기술 분야의 수입 증가는 주로 생산 단계의 중간재에 집중돼 오히려 국내 기업들의 활동을 보완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중기술 분야에서도 국내 기업을 문 닫게 하는 등의 부정적 영향은 적었다는 분석이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중국산 제품의 수입 증가는 국내 경제의 안정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올해 고유가 등의 압박 요인이 있었음에도 물가가 안정세를 유지한 데는 중국산 제품의 낮은 가격이 한 몫 했다고 분석한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국회 연설처럼 양자 관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밀접해진 한국과 중국 시장. 그 관계에서 우리가 실익을 챙기는 데는 더욱 더 현명한 지혜가 절실해지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