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전기 노동자 7개월 거리농성부도→법정관리→외국 투기자본 매각 뒤 청산, "정부개입, 책임져야" 주장

/ 사진제공=금속노조
“지난해 10월31일부터니까 벌써 7개월째 집에 못 들어가고 있네요. 그동안 밤낮없이 공장을 지키며 ‘철농’(철야농성)한 게 일수로는 200일이 넘은 셈이죠.”

경북 구미시 공단동의 오리온전기. 1965년 설립돼 한국 최초의 흑백 TV용 브라운관을 생산한 기록을 가진 디스플레이 전문업체다. 한때는 옛 대우그룹의 알짜 계열사로, 구미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주요 사업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던 회사다.

하지만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오리온전기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멈춘 지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10월 31일 회사 청산 결정이 내려진 뒤로 공장 문을 닫아 걸었기 때문이다. 돌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지금 길거리 곳곳에서 절규하고 있다. 왜 그럴까?

오리온전기는 지난해 4월 미국계 자본인 매틀린 패터슨에 매각된 직후 다시 5월에 홍콩계 펀드인 오션링크에 재매각됐다. 새로운 대주주는 고용 안정을 보장하고 신규 투자를 약속했다.

2003년 5월 회사 부도 후 오랜 법정관리에 지쳐 있던 직원들의 가슴에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새 희망이 돋아났다. 하지만 오션링크가 인수한 지 불과 5개월이 지난 10월 31일. 대주주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청산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1,300여 명의 노동자들은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신세가 돼버렸다.

오리온전기 노동자들도 그냥 당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청산 저지’와 ‘공장 정상화’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싸움은 간단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싸울 상대가 없다는 점이 곤혹스러웠다. 대주주가 선임한 경영진과 대표 청산인은 대리인에 불과했고 청산 과정의 실질적 배후는 처음 오리온전기를 인수한 매틀린 패터슨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오리온전기 지회 손학수 사무장은 “매틀린 패터슨은 회사를 팔아치우고 한국을 떠나버렸으니 쥐어박을 상대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처음엔 도대체 어디에다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백방으로 자구책을 찾던 오리온전기 지회는 일차적으로 사법당국에 해결책을 호소했다. 우선 매틀린 패터슨 대표와 한국 대리인, 오션링크 대표 등을 올해 1월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또한 3년간 고용 보장 약속에 근거, 남은 기간의 임금을 받기 위한 민사 소송도 제기했다.

아울러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극단적 방법도 동원했다. 지난 1월 25일 신문과 방송을 도배했던 이른바 ‘외교통상부 청사 난입 사건’을 일으킨 것.

손학수 사무장은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청사에 뛰어든 것은 정부가 오리온전기 사태에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라는 촉구 성격의 행위였다”며 “물론 불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오리온전기 지회는 그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회사 매각 과정을 상세히 파악했다. 회사 매각에 정부 관료들의 ‘개입’이 일부 있었다는 사실도 포착했다.

지회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2005년 4월 8일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박종구 경제조정관의 주재로 오리온전기 채권단 회의가 소집됐고, 이 자리에서 박 조정관이 ‘시간이 갈수록 기업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조기 매각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밝혔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배태수 오리온전기 지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얼마 전 박종구 조정관을 만났지만 명쾌한 해명을 듣지 못했다”며 “오리온전기 매각에 관여한 것은 언론을 통해 이슈로 부상되는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답변하더라”고 말했다.

박 조정관은 회사를 살리고 근로자들의 고용도 보장되는 쪽으로 가자는 순수한 뜻에서 매틀린 패터슨의 손을 들어줬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책임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오리온전기 지회는 정부 관료의 이런 답변조차도 정부의 직무 해태나 무능을 스스로 드러내는 게 아니냐고 분개하고 있다. 때문에 지난달 10일에는 국회의원 등의 서명을 받아 감사원에 국민감사 청구를 냈다. 오리온전기 매각 과정에 개입한 정부 관계자들의 직무 행위 전반의 의혹을 살펴달라는 것.

배 지회장은 “정부는 3년 동안 고용 보장과 신규 투자를 한다는 약속만 믿고 정체도 잘 모르는 외국계 펀드에 1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회사를 매각하도록 용인했다”며 “만약 정부도 사기 당했다면 매틀린 패터슨을 상대로 소송을 내든지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장화식 집행위원장은 “매틀린 패터슨은 회사를 인수한 후 알짜는 챙기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브라운관 사업은 청산해버렸다. 물론 고용 보장이라는 약속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이는 돈되는 것만 챙겨가는 전형적인 외국계 ‘먹튀’ 자본의 사기 행각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내 기업이 외국 자본에 매각될 때는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매각 조건을 어겼을 때는 어떻게 한다는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은 물론 법적으로도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을 제도화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공적자금이 들어갔거나 부채 탕감을 해준 기업의 경우에는 인수할 기업의 과거 행적을 치밀하게 조사하는 등 자격을 엄정 심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단물만 빼가는 일부 외국계 자본의 비도덕적 행태에 피해를 보는 것은 애꿎은 노동자이며 국민들이다. 경영진을 잘못 만나 우량기업서 부실기업, 청산기업으로 팽개쳐진 오리온전기. 오늘도 노동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무더운 거리를 떠돌고 있다.

알짜 챙기고 팽개친 美 '매틀린 패터슨'

▲ 오리온전기 직원들이 광화문 지하도에서 노숙투쟁을 하고 있다.

매틀린 패터슨에 매각되기 전 오리온전기의 자산가치는 2,184억원에 달했다. 게다가 대우사태 당시 오리온전기에 들어간 공적자금도 1조3,000억원이나 됐다.

하지만 매틀린 패터슨의 오리온전기 인수 금액은 고작 600억원. 그것도 회사 운영자금으로 지원받은 100억원을 빼면 실제 들인 돈은 500억원에 불과하다.

노조 관계자는 “공장 설비를 고철로만 팔아도 1,000억원이 넘는 회사를 거저 인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또한 매틀린 패터슨은 3년간 회사 분할 및 매각을 하지 않고 고용안정도 보장한다는 것을 인수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이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인수 직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는 유기발광 다이오드(OLED) 사업부를 분사한 데 이어, 브라운관(CRT) 사업부만 남은 회사를 홍콩계 펀드인 오션링크에 재매각한 것.

결국 매틀린 패터슨은 오리온전기를 턱없이 낮은 헐값에 인수해 알짜 사업부만 챙기고 나머지는 가차없이 내팽개친 셈이다.

이와 관련, 노조 관계자는 “매틀린 패터슨은 현재 오리온전기의 PDP, OLED 사업부 및 해외 공장 등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처음부터 뜻에 없었던 CRT 사업부와 해당 노동자들만 교묘하게 청산한 것이다”라고 분개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