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회장 구속 석달째… 해외투자 등 차질 잇달아, 일부선 "정 회장 조기 복귀로 그룹 시스템부터 바꿔야"

▲ 지난 4월 중국베이징 현대차 제2공장 부지를 둘러보고 있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
현대자동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정몽구 회장이 구속 수감된 지도 2개월이 다 돼가고 있다.

정 회장의 경영공백이 길어지자 검찰 수사로 삐걱대던 현대차의 주행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다.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오너의 용단이 필요한 대형 프로젝트는 사실상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단일 프로젝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는 일관제철소 사업이 있다. 계열사인 현대제철이 당진공장 인근 96만평 용지에 일관제철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 회장 공백으로 투자일정이 지연되고 있다.

우선 일관제철소에 성공하려면 철광석과 유연탄 등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정 회장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 회장은 당초 7월께 세계 최대 철광석 공급업체인 브라질 CVRD를 직접 방문해 철광석 장기공급계약을 위한 협상을 마무리짓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속기간이 당초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MOU 체결이 연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그룹측은 염려하고 있다. 일관제철소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제철은 지난해 12월 정 회장이 호주 BHP빌리턴 광산을 직접 방문해 MOU를 체결한 데다 CVRD와도 협상이 잘 진행돼 원료확보 문제는 거의 다 해결했다고 안심하던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료 운반선을 확보하고 생산설비를 도입하는 등 투자 계획도 추진일정 지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현대제철측은 철광석을 호주와 남미에서 들여오려면 대형선박에 대한 장기 용선계약을 맺어놔야 하는데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료 하역장비와 콘베이어 벨트, 용광로와 제강공장 등 대규모 설비도 발주를 완료해야 하는 시기가 됐지만 정 회장 부재로 공급선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의 일관제철소 사업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부터 추진해오던 그룹의 숙원사업. 정 회장이 자동차 품질경영 이외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현대제철은 총 5조원 이상을 투자해 오는 2010년 이후 연산 350만 톤 규모 용광로(고로) 2기를 건립하려는 계획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올해 초에는 충남 당진공장 인근에 96만평 용지를 지방산업단지로 지정받아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글로벌 경영의 완성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해외공장 추가 건립 사업도 궤도를 이탈한 상태다.

현대차는 10억 유로를 투자해 오는 2008년 하반기 체코에 자동차 공장을 건립하려는 계획에 따라 5월 18일 밀란 우르반 체코 산업통상부 장관의 방한에 맞춰 `투자협정계약'을 체결했지만 아직 착공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는 공장용지 정지작업에 앞서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개최하고 주민이주, 환경보전 대책수립, 주정부 인허가 신청 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정 회장의 부재로 중요결정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일정이 지연되고 있다.

기아차 조지아주 공장의 경우도 3월 투자계약을 맺은 뒤 4월 26일 착공일로 잡았다고 기공식이 무기 연기된 이후 아직까지 착공 일정을 못잡고 있다. 특히 공장건설을 위한 현지법인 설립도 늦어지고 있는 데다 인사결정 지연으로 현지 주재원 파견도 지연되는 등 기초적인 준비작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기아차 관계자는 "현지법인 설립이 늦어지다보니 조지아주 정부 관계자들도 용지 정지작업 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자칫 생산계획에 차질이 빚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현대차그룹이 흔들리면서 현대기아차와 함께 유럽 진출을 준비해온 중소 협력업체들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15억원을 투자해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 인근에 공장을 건립한 동일고무가 대표적인 사례다.

동일고무는 현대차도 체코에 공장을 세운다는 소식을 접한 뒤 135억원의 추가투자를 결정했다. 그러나 체코 투자가 늦어지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오명환 DRB동일 상무는 "현대차가 체코 공장을 짓는다고 해서 투자를 결정했는데 지금 계획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며 "우리도 투자 준비를 구체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데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이 사업이 성사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물어오면서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답변을 못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막대한 금액을 들여 독일월드컵 스폰서 자리를 따냈지만 월드컵 마케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다. 정 회장이 참석하기로 약속돼 있던 월드컵 개막식과 `굿윌볼 로드쇼 피날레' 등 각종 공식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당초 기대한 것만큼 홍보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이번 월드컵이 당초 전 세계 213개국에서 350억명이 시청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로고 노출, 차량 지원 등을 통해 약 9조원의 브랜드 홍보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정 회장이 월드컵을 활용한 비즈니스 외교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면서 그 효과가 크게 반감된 것으로 자체 판단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전문경영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 INI스틸 한보철강 전경

오너가 자리에 없다고 해서 이런 문제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서야 글로벌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지적에 대해 그룹 내부 임원들은 현대차그룹이 다른 대기업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 달라고 말한다.

한 임원은 "정 회장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스타일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는 스타일"이라며 "그러한 의사결정구조가 아무런 준비없이 단번에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현대차의 조직체제를 보더라도 정 회장 경영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 회장 밑에 제2인자가 있어서 회사 경영을 대리하는 다른 대기업들과 달리 정 회장을 정점으로 수평적으로 연결된 수많은 전문경영인이 각 분야를 나눠맡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따라서 정 회장이 없으면 자신의 분야 이외의 다른 분야까지 총괄하면서 중요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경영자가 없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이 정 회장 석방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자동차업체들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시장경쟁 속에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데 반해 현대차만 3개월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수출로 올리는 상황에서 환율마저 불리하게 움직이면서 경영환경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때문에 현대차그룹이 급한 불을 끄기위해서는 정 회장의 경영복귀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정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뒤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현대차그룹을 `1인 경영체제'에서 전문경영인의 역할을 늘리는 `시스템 경영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 그룹이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정혁훈 매일경제신문 기자 moneyjung@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