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부터 4차 협상

연말까지 다섯 차례로 예정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9월 3차 협상을 끝으로 마침내 반환점을 돌았다. 하지만 양국은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주요 쟁점들에 대해 서로의 확연한 입장 차만을 확인한 채 10월 23일부터 4차 협상이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김종훈 한미 FTA 우리측 수석대표는 3차 협상이 열린 미국 시애틀에서 이 같은 상황을 씨름판에 비유했다. 김 대표는“초반 기선제압을 위한 치열한 기싸움에 이어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지켜보는 관객들로서는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겠지만 아직은 상대방에 대해 화려한‘배지기’같은 기술을 거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이는 총 19개 분야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협상 과정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상대방의 정확한 의중 파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아직까지는 탐색전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협상에 임하는 상대방의 마지노선과 섬세한 판단 기준, 또 이와 연계된 각종 이해 당사자들의 반응과 산업계 파급 효과 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상대방에게 기술을 거는 순간, 자신의 몸체가 오히려 땅에 들여 메쳐지는 위기의 순간이 닥칠지도 모른다.

협상은 살얼음판이다. 아직 뜸이 덜 들었다. 협상에서 본격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를 구하고 양해를 얻어 ‘빅딜’을 도출하기 위해선 그만큼 제대로 된‘뜸들이기’작업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 협상의 수순이기 때문이다. 10월 우리나라에서 열릴 4차 회의부터 협상은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상회담으로 돌파구" 기대감

3차에 걸친 뜸들이기 작업에 이은 4, 5차 협상은 실질적인‘주고받기’식 협상이 구체화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이 같은 기대감은 우선 최근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의 협상의지를 재확인하면서 더 무게감이 실린다.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한미 FTA 체결에 대한 확고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것이 단지 상징적인 제스처이고 선언적인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반환점을 돈 협상테이블에는 커다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은 굵직한 협상의 원칙과 지침에 대해 협의했을 가능성이 높아 향후 협상에서 주요 쟁점들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적어도 협상 고위층 간에 ‘면대면’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협상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각론으로 빠져들면 상대방의 취약 분야 등에 대한 개방 요구는 늘어나는 반면 최대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입장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자국의 마지노선을 어디까지 제시했고 이에 대한 입장 조율을 어떻게 했는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 결과는 4, 5차 협상에 가장 큰 변수이기 때문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수전 슈워브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정상회담에 앞서 통상회담을 열고 한미 FTA 협상의 진행상황 점검과 핵심 쟁점들에 대한 의견 조율을 했다. 협상의 실질적인 내용은 이들의 회담 테이블에서 이뤄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FTA에 반대하는 국내 일각에서는 한미 FTA 체결의 걸림돌로 언급되는 쟁점들이 정상회담을 통해 뒷거래되지는 않았나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한국측에 민감한 농산물과 미국에겐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섬유 분야를 따로 떼내 조기 협상타결을 짓는 2단계 딜이 논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상회담과 통상협상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4, 5차 협상에서는 FTA 협상타결을 위한 실질적인 진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을 감지할 뿐이다.

김종훈 대표는 3차 협상을 마치고 난 후 기자들과 만나“협상이 실질적인 진전 없이 끝났지만 회의적인 시각만으로 볼게 아니다”며 “협상의 생리상 회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임계상황에 다다르면 한순간에 큰 진전을 이루는 경우가 있다”고 강조했다.

협상전문가의 이 같은 예감은 향후 4, 5차 협상에서 그려질 큰 그림의 윤곽이 어느 정도 감지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상회담 이후 양국의 협상 전략은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표가 말했듯 실질적으로 임계상황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미 양국은 4차 협상 전까지 쟁점이 있는 해당 분과별로 화상회의와 개별 회의를 잇따라 열어 협상 진행 속도를 한층 앞당길 계획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양측 협상단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부분이다.

김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한미 FTA 특위 보고에서 내년 3월까지를 FTA 타결 시한으로 제시했다. 올해 말까지 타결을 보려는 미국측의 기선을 꺾는 한차례 쿠션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 대표의 말대로 임계상황은 연말 5차 협상이 끝날 무렵 정점에 달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협상은 연말 4, 5차로 가면서 가속도를 낼 전망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별 진전 없이 종종걸음의 모습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협상테이블 밑에서 벌어지는 물밑 힘겨루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또 연말을 넘기면서 국가 최고통치권자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정치적 판단과 그 이후의 파급 효과를 놓고 청와대도 바쁘게 주판알을 튕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로서도 국민들에게 앞으로 전개될 FTA 성과물에 대해 발가벗고 뛰어들어 설득작업에 매달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줘야 하는 냉정한 협상장 밖에서는 또 한차례의 국론 분열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이 대선을 치루는 시점이라는 것도 커다란 변수다. FTA는 더 이상 통상문제가 아닌 선거판으로 달려가는 주요한 정치이슈로 부상할 것이다. 결국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한미 FTA 이슈는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접하게 될 키워드가 될 것은 불가피하다.

농산물·섬유 대타협에 촉각

한미 양국 협상단에게 있어 협상 쟁점은 19개 모든 분야에서 어느 것 하나 등한시 될 수 없는‘올 인 원(All In One)’사항이다.

한국측은 3차 협상을 거치면서 쌀 등 농산물의 민감 품목에 대한 시장개방 제외와 개성공단의 제품의 한국산 인정, 미국의 반덤핑 조치에 대한 제도 개선 등 3대 쟁점사항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물론 이들 항목이 갖는 중요도와 국내에 미치는 파장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언론에서 보도돼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요구들이 협상 막판에 어떻게 가공되고 조합을 이뤄 결론이 날지는 협상단 어느 누구도 아직은 장담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특히 이들 핵심사항 가운데 한 카드를 우리가 버려야 하는 정말 임계상황이 다가올 경우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을 하려 하지 않는다. 아직은 상상하기조차 두렵기 때문이다.

배종하 (농림부 국장) 농산물 분과장은 “쌀 등 농산물의 민감 품목에 대해 시장의 문을 열라는 것은 한마디로 협상을 깨자는 얘기”라며 “미국도 3차 협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파악하고 쌀 등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협상장 분위기를 전달했다. 그러다 보니 3차 협상 때까지 나온 이슈라고는 이미 수입시장이 열려 있는 사료용 곡물 등 비 민감품목에 대한 양측의 입장 교환뿐이다. 협상은 종종걸음이다.

미국측으로서는 쌀 등 우리의 민감 품목에 대해 관세 철폐의 예외 적용을 받을 수 있는 기타 품목으로 인정해주더라도 관세 일부 감축이나 저율관세할당물량(TRQ) 등 방식을 통해 부분적으로 개방을 확대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또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제도와 관련, 미국측은 관세가 철폐된 뒤에는 제도를 적용하지 말아야 하고 재발동 금지 등 제한적인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한국측은 제도의 존속 기간에 제한을 두지 말고 재발동도 가능한 방식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그러나 통상 전문가들은 협상 끝 무렵에 가면 부분개방이 이번 농산물 협상의 대세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론 세이프가드를 얻어내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부분개방의 선결 조건이다. 결국 얼마만큼의 부분을 얼마까지 시간을 벌면서 개방하느냐가 협상의 남은 과제인 셈이다.

미국이 우리의 민감 품목인 농산물 분야 협상에서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우리로부터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의 취약 분야인 섬유시장에 대한 개방요건 완화가 바로 그것이다. 양국은 3차 협상 이전부터 상품과 섬유ㆍ농산물 분야에 대한 양허안 교환을 통해 이들 분야를 하나로 패키지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특히 웬디 커틀러 미측 대표는 3차 협상에서 미국이 보수적으로 작성해 한국측에 전달했던 상품ㆍ섬유 분야 양허안에 대해 우리측으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자 즉각 다음날 수정본을 내놓은 등 섬유분야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드러냈다.

미국은 섬유 분야에서 세이프가드 제도의 발동과 미국 섬유산업의 강력한 비관세 장벽인‘얀 포워드(yarn forward)’제도의 유지를 위해 결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양측간의 첫 번째 ‘빅딜’은 서로의 취약 분야인 이들 섬유와 농산물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한국측에 농산물 세이프가드를 내줄 경우 미국은 섬유 분야에서 세이프가드를 그대로 가져가면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나리오가 말처럼 쉽게 현실화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4,5차 협상이 끝나더라도 서로 간의 이해관계로 상충돼 벌어진 간극을 좁히기에는 상당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