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까다로워 그동안 부활성공 全無… 뒤늦게 제도 손질 나서

일몰제도(sunset clause)라는 게 있다. 어떤 법령이나 제도가 원래 취지와 목표를 달성하면 자동적으로 폐지되도록 하는 제도를 뜻한다. 그런데 최근 당초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한 걸음도 못 떼고 ‘일몰’할 뻔했던 제도가 있었다. 지난해 5월부터 실패한 벤처 경영인들의 재기를 지원한다는 취지로 실시된 이른바 ‘벤처 패자부활제’를 두고 하는 소리다.

패자부활제는 2004년 말 정부가 내놓은 벤처 활성화 대책의 핵심사항 중 하나로, 벤처 경영인들의 기술과 경험이 사장되는 것을 막고 사회적 자산으로 승화시키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정책 발표 때부터 큰 관심을 모은 패자부활제는 그러나 막상 시행에 들어가자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제도 자체에 미리 쳐 놓은 높은 장벽 때문이었다.

패자부활제를 노크하는 신청자는 1차 도덕성 평가, 2차 기술 및 사업성 평가를 통과해야 최종적으로 지원을 받도록 돼 있었다. 문제는 그 전에 스스로 신용회복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다수 실패한 벤처 경영인들이 보증 채무 등 빚더미에 올라 앉아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 있는 현실을 간과한 것이다.

정부가 '벤처 패자부활제' 개선에 나섰으나 벤처인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사진은 강남 테레한밸리의 전경.
물론 제도 도입 과정에 이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원 조건을 완화할 경우 또 다른 ‘도덕적 해이’ 논란이 일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재정경제부와 벤처기업협회는 지원 자격은 까다롭더라도 일단 제도를 시행해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

이와 관련,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작년에 패자부활제의 구체적인 틀을 만든 뒤 사전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신용회복을 전제로 한 게 큰 걸림돌로 드러났지만 우선 제도를 시행한 뒤 개선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지난해 벤처기업협회가 패자부활 창구를 개설한 직후에는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워낙 전화가 많이 쇄도해 다른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원서 접수 창구를 찾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신용회복 제약 때문에 지원서를 낼 형편이 되는 해당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원 자격은 되더라도 1, 2차에 걸친 깐깐한 평가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차세대 이동통신용 스마트 안테나에 대한 특허 기술까지 보유했으나 대기업 횡포와 주변의 농간에 허무하게 무너졌던 A사 P사장(43). 그는 패자부활제에 부푼 꿈을 안고 지원했지만 결국 수억 원의 채무로 인한 신용불량 꼬리표 때문에 1차 도덕성 심사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비단 P사장뿐 아니라 상당수의 ‘양심적인 실패자’들이 대부분 서류 심사 단계에서 걸러졌다.

이런 사정 때문에 지난해 패자부활 실적은 전무했다. 5월부터 12월까지 7개월 동안 1차 도덕성 평가 단계까지 간 지원자는 고작 5명. 이 단계를 어렵사리 넘어 2차까지 간 경우는 2명이었으나 그마저도 최종 탈락의 고배를 들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아무런 수혜자도 낼 수 없는 제도를 도대체 왜 만들었느냐”는 무용론이 비등했고 제도 도입을 강력히 요청했던 벤처기업협회도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 들어 패자부활제는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벤처인들도 기대를 접은 데다 재경부도 별다른 개선 방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사실상 폐업 상태로 방치된 것.

정작 속이 탄 쪽은 벤처기업협회였다. 자신들이 주창한 제도를 어떻게든 살려내지 못하면 벤처 업계 내에서 위신 추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경부 일각에서는 ‘폐지론’까지 심각하게 거론되던 터라 더욱 애가 탔다. 때문에 협회는 주무 부처인 재경부에 계속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난 9월 ‘기업환경개선 종합대책’이라는 정부의 포괄적 경제정책 발표에서 패자부활제 개선에 대한 약속을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패자부활제 개선 방안 가운데 핵심은 종전의 ‘선 신용회복, 후 도덕성 및 기술 평가’ 절차의 선후를 바꾼 것이다. 즉 신용회복이라는 최대 걸림돌을 뒤로 돌리고 평가 절차를 앞으로 당김으로써 일단 지원 문호를 대거 넓힌 셈이다.

이로써 신용불량 상태의 벤처인들도 패자부활제 신청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성 및 기술성 평가를 통과하면 보증 지원과 함께 신용회복 지원도 동시에 받을 수 있게 된다. 기존에는 스스로 신용회복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이제부터 신용회복위원회가 대신 절차를 밟아주기로 한 것.

이와 관련,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그동안 협회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 마련한 개선 방안이며 나름대로 파격적인 내용도 많이 담았다”고 자평하며 “12월 중에는 재경부의 세부지침과 협회의 구체적인 운영계획이 발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개선 방안이 패자부활제의 ‘부활’을 확실히 담보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특히 총 채무액 기준을 ‘30억원 이하’에서 ‘15억원 이하’로 변경한 점은 오히려 지원 조건을 강화한 측면이 짙다는 것이다.

실제 많은 벤처인들이 웬만하면 수십 억원의 보증, 연대채무를 지고 있는 상황에 총 채무액을 ‘15억원 이하’로 제한하면 수혜자는 영세기업 경영자들에 국한될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어차피 패자부활제가 일종의 특혜인데 기준을 너무 약하게 잡을 수는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아울러 총 채무액이 과다한 경우는 재기한 뒤에도 채무상환(원금 및 이자 지불)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점도 고려했다는 게 협회측 설명이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는 지적도 업계를 중심으로 제기된다. 무엇보다 재기를 꿈꾸는 벤처인들이 더 이상 패자부활제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우선 그동안 재기의 노력을 해온 사람들은 웬만큼 나름의 활로를 개척했기 때문에 패자부활제의 문을 두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패자부활제를 통해 재기한다 하더라도 늘 ‘패자부활’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닐 뿐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도 풍족하지 않은데 구태여 이용할 필요가 무엇 있느냐는 시각도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스스로 신용불량에서 벗어난 한 벤처인은 “솔직히 주변의 벤처인들과 대화를 나눠 보더라도 (패자부활제에 대해) 좋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며 “나도 지난해 패자부활제에 도전했다가 채무 때문에 낙방했었지만 이젠 거기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업계와의 형평성 논란이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당국에서는 웬만하면 신청자가 몰리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게 솔직한 마음 아니냐”고 꼬집었다. 재경부 등에서는 패자부활제 도입으로 생색만 냈을 뿐 실질적인 기회를 부여하는 데는 인색했다는 것이다.

1년 6개월여 빈 수레만 굴려온 패자부활제는 과연 부활할 수 있을까. 벤처 업계 민심으로 봐서는 ‘사후약방문’이 될 공산도 없지 않은 듯하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