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에 920선 붕괴… 30억弗 손절성 매도물량 대기 시한폭탄

원래 12월에 접어들면 뉴욕, 런던 등지의 글로벌 외환시장은 눈에 띄게 한산해진다. 거래량도 줄어들고, 환율의 움직임도 둔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이맘때쯤이면 외환시장의 주된 플레이어들인 주요 은행의 외환딜러들이 더 이상 수익에 목을 매지 않기 때문이다.

유능한 외환딜러라면 11월 말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초에 세웠던 이익 목표를 대부분 달성하기 마련이고, 그러니 이들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끼어있는 12월 들어서까지 외환거래를 악착같이 할 필요가 없다.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대규모 거래를 해치우며 시장을 좌지우지하던 외환시장의 큰손들은 12월이 되면 일찌감치 휴가를 떠나버리고, 외환시장은 급격하게 조용해지게 된다.

하지만 12월이 되면 한가해진다는 것은 뉴욕이나 런던 등 국제적인 외환시장에 국한된 말이다. 해외 외환시장이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정작 서울 외환시장은 되려 12월만 되면 외환딜러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한동안 잠잠하던 환율이 12월이 되기만 하면 약속이나 한듯이 갑자기 급변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올해라고 하여 예외가 아니다. 지난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원 환율은 920원 선마저 무너뜨리고 910원대로 내려앉으면서 97년 10월 이후 9년1개월 만에 최저치를 경신하였다. 더구나 환율의 하락폭이 커지면서 이는 단순히 외환딜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출을 비롯한 국내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항시 환율이 하락할 때마다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서울 외환시장의 일부 성급한 외환딜러들은 이런 식의 추세라면 달러/원 환율이 올해 안에 900원 선마저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들의 ‘성급한’ 주장이 그다지 설익고, 섣부르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만큼 최근 달러/원 환율의 급락세는 경사가 가파르며, 아울러 환율을 둘러싼 외환시장의 환경이 달러 환율에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2월쯤에 달러/원 환율이 하락하는 것은 매년 되풀이되는 연례행사이다. 2004년에는 12월 중 달러 환율이 25원 하락하였고, 2005년에는 12월 한 달 동안 환율이 35원 가량 떨어진 바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출기업들의 수출물량이 12월에 몰리기 때문이다. 수출목표와 실적 달성을 위하여 해를 넘기지 않으려는 기업들의 수출이 연말이 다가올수록 집중되기 마련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달러 매도 물량 적체를 가져와 환율 압박 요인이 된다.

또한 주식시장에서 연말 배당을 노리는 외국인들의 투자자금이 원화로 환전되면서 달러 매도 압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는 예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출기업들의 달러 매도물량이 몰린 탓도 있으나 그에 덧붙여 근본적으로 해외 시장에서 달러화의 가치가 속락하고 있는 것이 달러/원 환율의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는 또 다른 배경으로 지적된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엔 환율이 지난 10월 중순 120엔에서 하락하기 시작하여 최근 115엔 선마저 무너뜨리며 추락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또한 유로화의 대 달러 환율은 1.33달러 선까지 상승하며 20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유로가 강세라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달러의 가치가 유로화에 대하여 하락한 셈. 또한 달러는 영국 파운드에 대해서는 14년 사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상황이기도 하다.

이처럼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 금리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경제지표들이 미국 경제의 침체 가능성을 엿보이자, 미국 경기에 대한 우려감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 결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FRB)가 이르면 내년 초부터 달러 금리를 내릴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외환시장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달러화 가치 하락을 촉발하는 이유가 되었다.

미 달러화의 금리가 인하된다면 그나마 이제까지 달러화 가치를 지탱하는 요인이 되었던, ‘달러 금리가 다른 통화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장점마저 상당부분 잃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 미국의 금리는 내년 초에 다소 인하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에 최근 경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일본이나 유로존은 거꾸로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미 일본은행은 기존의 제로금리 정책에서 탈피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바 있으며, 유로 중앙은행도 금리 인상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들 국가가 조만간 금리를 올리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로 간주된다. 그러니 수익률을 좇아 움직이는 대규모 국제 금융자본으로서는 금리가 인하되어 수익률이 낮아질 우려가 있는 미 달러화에서 빠져나와 향후 금리 인상이 예상되는 일본 엔화나 유로화로 투자처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매도 압력으로 작용한다.

아울러 미국의 쌍둥이 적자, 즉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달러화 가치의 하락은 불가피하다는 미 행정부의 선택도 달러화가 하락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말로는 "강한 달러"를 되풀이하지만 실상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할 수도 없고 또 그러려 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하며 결국 달러화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주장에 외환시장의 참여자들이 대부분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사실 미국의 쌍둥이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달러 약세를 방치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1조 달러 이상에 이르는 거대한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 외환보유액 통화를 달러 일변도에서 유로나 엔, 파운드 등 다른 통화들로 다변화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것도 달러 약세를 유인하는 이유가 된다.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화의 가치가 상승하기보다는 하락할 공산이 높다는 쪽으로 시장의 의견이 쏠리다보니 자연스럽게 달러/원 환율도 하락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 연일 대미 무역흑자가 늘어나고 있는 중국의 위안화가 내년에도 여전히 평가 절상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우리나라 달러/원 환율로서는 부담이다. 위안화가 평가 절상되는데 우리나라 원화만 평가 절하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

해외 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내리기에 달러/원 환율도 덩달아 하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달러/원 환율의 하락폭이 다른 무역 경쟁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가파르다는 것이 문제이다. 올해 초부터 지난주까지 미 달러화에 대한 우리나라 원화의 평가 절상률은 10.6%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태국의 바트화(14.6%)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같은 기간에 일본 엔화의 가치는 달러화에 대하여 2.7% 올랐고, 중국 위안화도 3.1% 평가 절상되는 정도라는 점과 비교하면 원화의 가치가 얼마나 가파르게 치솟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원화의 가치가 다른 통화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고평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제는 달러/원 환율이 내릴 만큼 내렸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견해는 소수에 국한되고 있고, 시장 대다수는 연말까지, 혹은 내년 초까지 글로벌 달러가치가 하락하면서 이에 동반하여 달러/원 환율도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910원 부근에는 약 30억 달러에 이르는 녹 아웃 옵션 물량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외환시장에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만일 환율이 일시적으로라도 910원을 건드릴 경우, 대규모 손절성 매도 물량이 시장에 쏟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럴 경우, 자칫 큰 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환율이 추가적으로 하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김중근 메버릭 코리아 대표 jayk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