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경제의 CEO… "알아야 돈 번다" 너도나도 재테크 전선 가세한국일보 주최 '아줌마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 강좌에도 주부 몰려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양모(30) 씨는 결혼한 지 반 년쯤 된 초보 주부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통해 마련한 6,000여 만원을 갖고 남편과 살림을 차린 그는 요즘 어떻게 하면 빨리 돈을 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신혼 깨소금 재미마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주변에선 ‘억억’ 하는데 도대체 언제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몰라서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처럼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살 생각은 아직 없다. 젊은 시절부터 빚더미에 저당 잡히는 인생은 싫기 때문이다.

주거형 오피스텔에 전세로 사는 양 씨는 요즘 남편과 자신의 여유자금을 합쳐 ‘비교적 저렴한’ 근처 오피스텔을 하나 살까 궁리 중이다. 부부의 둥지로 삼으려는 게 아니라 월세를 놓을 목적이다. 당분간 자신들은 전세로 살면서 월세 수입을 얻어볼 요량인 것이다.

양 씨는 또 괜찮다는 말만 들었던 적립식 펀드 상품에도 매월 일정액을 넣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각 금융기관 별로 판매하는 상품을 꼼꼼히 비교하고 있다. 처녀 시절엔 거들떠도 안 봤던 경제신문도 필독하는 버릇이 들었다. 돈 모으는 방법으로는 적금밖에 몰랐던 그에게는 놀라운 변화다.

결혼 14년차 정모(43) 씨는 지방 대도시에 살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주부다. 결혼 후 10여 년 동안 시부모를 모시며 살던 그는 몇 해 전 그동안 남편과 함께 착실하게 모은 적금으로 30평형대 아파트를 사서 독립했다.

정 씨는 체질적으로 돈 욕심이 없는 편이다. 주변의 친지들이 아파트에 투자해 큰 돈을 쉽게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잠깐 부러움을 느낄 뿐 그 대열에 동참할 생각은 않고 살았다. 게다가 번듯한 아파트에 부부 합계 연 소득 8,000만원 정도면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아파트 분양하우스에 몰려든 주부 등 재테크 열기가 뜨겁다. 배우한 기자
헌데 세상이 달라져도 많이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요즘 부쩍 들기 시작했다. 직장의 주부 동료들 가운데 20% 정도는 아파트 투자(투기) 등 공격적 자산 증식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다 주식 투자에 몰두한 경우도 적지않기 때문이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치관의 차이도 많이 느끼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시대와 동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도 솔직히 든다. 그래서 정 씨는 요즘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첫걸음을 뗐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으로 차이나펀드가 유망하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중국투자 상품에 가입한 것. 뿐만 아니라 재테크 서적도 자주 손에 쥐는 습관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생전 뜻을 잘 몰랐던 ‘포트폴리오 투자’라는 말이 곧잘 튀어나오기에 이르렀다.

수동적인 가계 운영은 옛말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이 재테크 분야에서도 큰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예전 같으면 재테크는 큰손, 복부인, 유한마담 등 평범한 주부와는 거리가 먼 일부 계층 여인들의 몫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적 권익과 위상이 높아지고 아울러 경제활동 참여가 크게 늘어나면서 주부들이 가정 내 의사결정 과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추세에 따른 현상이다.

실제 과거 가부장적 사회구조 아래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수동적으로 받아 아껴 쓰기만 했던 주부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30~40대 부부들 사이에서 재산 공동관리 방식은 흔해졌으며 심지어 이재에 밝은 주부가 직장생활에 바쁜 남편을 대신해 재테크에 관한 한 전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부터 두어 차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폭등세가 연출되면서 대박 신화가 자리잡고, 최근 몇 년 사이 간접투자 시장이 급성장하는 등 경제 여건이 크게 변화한 것도 주부들의 재테크 각성을 불러온 주요 배경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제일기획이 대한민국 주부의 현주소를 살펴본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주부의 비율이 2000년 66% 선에서 94% 선으로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4대 스트레스 요인의 하나가 바로 경제였다. 그만큼 2000년대 이후 한국 주부들의 의식세계는 경제와 재테크에 대한 관심으로 급속히 무장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조사 결과도 벌써 몇 년 전 일이니, 좀 과장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이미 ‘전(全) 주부의 재테크’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주부들의 재테크 열풍은 사회 곳곳에서 쉽사리 감지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백화점 문화센터나 증권사, 은행 등 금융기관이 주부 고객을 대상으로 여는 각종 강좌다. 요즘 부동산 강좌, 재테크 특강 등의 이름이 붙은 이들 강좌에 가보면 웬만한 곳은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주부들의 수강 열기가 뜨겁다.

실제 한국일보가 지난해 가을부터 매월 개최하고 있는 주부 대상 캠페인 ‘대한민국의 힘은 아줌마! 아줌마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 특강에는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주부들 수백 명이 몰려와 매번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처럼 각종 강좌 등을 이용해 재테크 정보와 노하우를 챙겨 가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지만 자신만의 투자전략을 가다듬어 재테크에 나서는 경우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주부들에게는 개인재무 컨설팅 전문가나 금융기관 프라이빗 뱅커들의 조언이 든든한 배경이다. 이와 관련, 상당수 재테크 전문가들은 아무래도 경제 지식과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주부들의 경우 재무 전문가와 투자 계획 등을 상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유한다.

실제 나름대로 수완이 남다른 살림꾼으로 평가 받는 주부들 중에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어설픈 재무 설계를 바탕으로 자산을 관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아줌마의 섬세함과 집요함 발휘

수도권 A시에 사는 주부 나모(42) 씨가 그런 예다. 나 씨의 재무 목표는 자녀 교육자금과 결혼자금, 부부 은퇴자금,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사업성 유동자금 형성이다. 그런데 재무상태를 분석해 보니 부채 비율과 저축률 등은 양호한 편이었으나 저수익 자산운용 방식으로 인해 재산 증식이 매우 더딘 상황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나 씨는 전문가의 진단을 통해 자신의 보수적 투자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되 수익률을 제고할 수 있는 몇몇 금융상품에 분산투자를 권고 받았고 이후 1년도 안돼 눈에 띄는 수익률 개선에 얼굴이 펴졌다.

주부는 가정의 보루이자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달리 말하면 아줌마의 힘이 가계의 힘이고 한국경제의 힘이다. 직장업무에 쫓기고 사회생활에 치인 남편들을 대신하는 가정 경제의 최고경영자다. 현실은 그렇게 가고 있다. 아줌마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재테크 전선에 섰고 남은 과제는 현명한 방법을 통해 수익을 쟁취하는 것이다.

한 재무 전문가는 “여성들은 재테크에서도 특유의 섬세함과 집요함을 긍정적 요인으로 발휘할 수 있다”며 “가정 경제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주부들이 늘어난 만큼 적극적인 역할 확대에 나서는 것도 여성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길”이라고 말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