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불황→ 호황' 경기 사이클 안 통해 국내 경제 역동성 잃어수출 치중 IT산업 구조·가계 부실 탓… 서비스 산업 육성이 해법

내수와 달리 수출은 꾸준히 한국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장사가 안 된 지는 벌써 몇 년째다. 경기는 언제쯤 풀리는 것이냐. 게다가 신문을 보면 경기 전망이 들쭉날쭉해 뭐가 뭔지 헷갈려.”

재래시장이나 동네 상가 상인들이 흔히 내뱉는 푸념이다. 이들의 긴 한숨 속에서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늘상 경기가 바닥을 맴돌고 있다는 것. 예전에는 경기가 나쁘더라도 몇 년간 참고 지내면 다시 호황을 맞는데 요즘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도대체 경기가 어떻게 된 것일까. 통상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기는 일정한 주기를 두고 상승(확장)과 하강(수축)을 반복하며 순환하게 된다. 그러면서 경기 사이클은 고점과 저점이 뚜렷한 파동 형태로 나타난다. 단지 이론적인 모형뿐만 아니라 실제 경제활동에서도 생산과 소비 주체들이 그 변화를 체감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이런 경기 사이클을 좀처럼 느낄 수 없다는 경제 주체들이 많다. 전통적인 경기 사이클이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경기 사이클의 침체 국면이 이전과는 달리 좀더 길어진 것에 불과한 것인가.

경기 바닥은 언제일까

지난 4월 7일 금융통화위원회를 마친 직후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의 성장률이 가장 낮은 구간에 해당한다. 미미하지만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밝혀, 국내 경기가 올해 1분기에 저점을 통과했음을 시사했다.

4월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결과는 이 총재의 발언을 수치상으로 재확인해줬다. 이에 따르면 1분기 국내총생산은 전분기보다 0.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경기의 완만한 재상승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민간소비와 설비투자 등 내수가 회복되는 조짐을 보인다는 점은 주목된다. 1분기 민간소비는 1.3% 증가해 3분기 연속 오름세를 유지했고 설비투자도 4% 늘어 2005년 이후 가장 활발한 모습을 나타냈다. 다만 반도체 등 IT산업 부진으로 제조업 생산이 0.8% 감소한 대목은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민간 경제연구기관들은 저마다 다소 엇갈리는 경기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는 국내 경기가 연착륙에 성공하면서 1분기에 저점을 통과했다는 입장이다. 반면 LG경제연구원과 현대경제연구원은 아직 국내 경기가 저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들 두 연구원들은 경기 하락이 당분간 지속되다가 2분기나 3분기쯤 돼야 바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 이유로 LG경제연구원은 미국 경기 하강이 하반기로 갈수록 세계 경제에 본격 반영되면서 국내 경기에도 부담을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현대경제연구원은 투자 지표나 수출 전망 등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고 있다.

호·불황의 진폭도 크게 줄어

이처럼 경제예측기관마다 서로 다른 경기 전망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매우 완만하고 밋밋한 추세를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최근 들어 경기 고점과 저점의 구별은 의미가 없어졌다는 지적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경기가 상승하는 듯하다가 곧바로 하강하는 경기의 단기 순환이 구조적으로 정착하는 양상이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좀처럼 열지 않는 것이나 기업들이 번 돈을 투자하기보다 금고에 쌓아두는 것도 그 결과라는 분석이다. 경기가 매우 짧은 주기로 등락하기 때문에 돈 쓸 시점을 판단하기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쯤 경기가 풀리느냐는 시장의 탄식이 수년째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기 사이클의 진폭은 경제의 역동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기에는 경기의 고점과 저점 간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경기 사이클의 변화 양태는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 추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1990년대만 해도 고점과 저점의 격차가 10% 포인트에 이르렀던 것이 2003년 이후에는 2%포인트 안팎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고점에서 저점에 이르는 주기도 1년을 겨우 웃돌 만큼 짧아졌다. 쉽게 말해 호황과 불황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으며, 그 때문에 경제 주체들도 경기 차이를 느끼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기 사이클이 과거와 달리 단기적인 순환을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경기 사이클 축소를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특히 수출과 내수 경기의 단절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된다. 예전에는 수출이 경기 상승에 불을 댕기고 소비와 투자 등 내수가 이를 뒷받침하면서 장기적인 경기 확장 국면으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그 같은 ‘공식’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IT부문에 특화된 국내 산업 구조 자체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IT산업은 비록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해 수출을 주도하고 있지만 내수 파급 효과가 적다는 결정적 단점을 갖고 있다.

IT산업은 10억원어치 생산당 고용창출 인원이 2000년 기준 5.8명으로 전체 산업 평균 20.1명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중간재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까닭에 생산량이 많아진다고 해도 국내 생산유발 효과가 크지 않다. 결국 IT산업은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도 내수 진작에는 속빈 강정인 셈이다.

이처럼 국내 산업의 IT의존도가 높은 터에 IT산업 자체의 경기순환이 매우 빠르게 이뤄진다는 점도 국내 경기의 변동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즉 세계 IT경기가 들썩이면 국내 경기도 수시로 동조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 증가, 신용카드 대란, 부동산 투기 열풍 등이 이어지면서 가계 부문의 소비 여력이 줄어든 것도 경기 사이클의 진폭을 줄인 또 다른 원인이다. 경기가 장기적인 상승 국면에 접어들기 위해서는 가계 소비 활성화라는 외부 에너지가 공급돼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자 경기가 맥을 못추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 사이클의 단축은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여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를 위축시킬 뿐 아니라 거시경제 운용을 책임진 정부의 정책 판단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한국 경제가 앞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려면 하루 빨리 서비스업 등 내수 산업의 육성을 통해 체질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