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中·대만 삼각파도에 맞선 '오월동주'세계 1·2위 업체간 전략적 제휴, 특허 교류 본격화로 경쟁력 제고 기대8대 상생협력과제 실천 통한 동반 발전, 협력과제 놓고 불협화음 조짐

이상완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장
시간을 몇 년쯤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04년 3월 중순 LG필립스LCD는 경기도 파주에 대규모 LCD 산업단지를 착공했다. 100만 평의 광활한 부지에 7세대 LCD 생산라인과 함께 연구소, 협력업체 등을 집중해 세계 디스플레이산업의 연구개발 및 생산 중심지로 키운다는 야심찬 계획의 발로였다.

2003년 10월에는 삼성전자가 일본 소니와 합작해 만든 법인 S-LCD가 충남 아산 탕정에 세계 최대의 8세대 LCD 생산단지인 크리스털 밸리 건설에 착수했다. LG필립스LCD의 파주 공장 건립은 삼성전자와의 LCD산업 주도권 경쟁에서 정면으로 맞불을 놓은 승부수였던 셈이다.

이때부터 삼성과 LG의 디스플레이 경쟁은 전면전 국면으로 빠져든다. 차세대 LCD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표준규격 선점 및 물량전 우위 확보에 불을 댕긴 것이다.

삼성과 LG의 싸움은 둘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두 고래의 자존심 경쟁은 관련 산업계 전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가 LCD 표준규격 싸움으로 인한 TV완성품 업체들과 소재, 부품, 장비업체들의 눈치보기와 줄서기였다.

이처럼 삼성과 LG라는 두 재벌기업이 주도하는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은 사실상 양분된 채로 서로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을 수년간 지속해왔다. 마치 ‘불구대천’의 적인 듯 한치 양보 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랬던 두 진영이 최근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가 발족하면서 극적으로 한 배를 타게 됐다. 협회 설립을 막후에서 거중 조정해온 산업자원부 김영주 장관은 삼성과 LG의 악수를 “현대판 도원결의와 같다”고 치하할 만큼 큰 의미를 부여했다.

삼성전자, LG필립스LCD(이상 LCD업체), LG전자, 삼성SDI(이상 PDP업체) 등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의 빅4 대표들은 지난 14일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창립 총회를 열고 상생협력의 결의를 다졌다. 아울러 삼성전자 LCD총괄 이상완 사장과 LG필립스LCD 권영수 사장이 사이 좋게 회장과 수석부회장을 맡아 디스플레이 산업의 향후 밑그림을 그려가게 됐다.

삼성전자 탕정 생산단지(왼쪽), LG 필립스 LCD 파주산업단지 (오른쪽)

이번 협회 발족을 계기로 디스플레이 업계는 ‘8대 상생협력 과제’ 실천을 통한 업계 동반발전 전략에 합의했다. 상생협력 과제는 특허 협력, 수직계열화 타파, 공동 연구개발 등을 핵심으로 한다.

패널 상호구매로 시장확대 기대 특히 주목되는 것은 빅4의 특허 협력이다. 그동안 이들 업체는 해외 업체와의 특허 협력에는 적극적이면서도 국내 업체와의 교류는 도외시해 왔다. 때문에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 2위를 다투는 삼성과 LG 간 특허 교류가 본격화되면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 전체의 기술 경쟁력이 크게 제고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아울러 TV완성품을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상대 계열사의 디스플레이 패널을 상호구매하기로 한 것도 저간의 재계 관행으로 보면 획기적인 결정이다. 두 그룹 간 패널 상호구매는 TV생산 업체에게는 비용 절감, 패널 업체에게는 시장 확대 등 효과를 가져와 궁극적으로 산업 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높여줄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한 수직계열화 타파는 삼성과 LG 진영으로 양분됐던 장비, 소재 업체들의 족쇄를 풀어줘,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이들 업체에게 시장 확대라는 선물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지금껏 국내 250여 개 디스플레이 장비 및 재료 업체 가운데 삼성과 LG에 동시 납품하는 회사는 고작 20여 개에 불과했다.

이와 함께 삼성과 LG 역시 보다 나은 품질과 가격 조건을 가진 업체와 거래를 할 수 있어 원가절감 등의 효과를 얻게 될 전망이다. 한마디로 디스플레이 산업 내에 건전한 선의의 경쟁 원리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 보내는 찬사처럼 ‘세계 최대 규모 디스플레이 연합’의 앞길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런 견해에는 무엇보다 세계 시장 1위를 놓고 자웅을 겨루던 ‘어제의 적’ 삼성과 LG가 한순간에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정서적으로 무리라는 현실론이 깔려 있다.

사실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며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업계의 중지를 모으는 창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벌써 수년 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양자 간 경쟁의 벽에 번번이 부닥쳐 무산됐던 터다. 지난 몇 달 간에도 초대 회장 자리를 어느 쪽이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협회 설립 움직임이 여러 차례 난항을 겪었을 정도다.

경쟁력 회복 뒤 관계가 관건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LG가 일본-대만의 연합군과 강력한 후발주자인 중국 등 삼각파도에 휘청대고 있는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을 살려야 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뜻을 합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라면서도 “다만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가 대외 경쟁력을 회복하게 되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될지 미지수”라고 여운을 남겼다.

실제 협회가 출범한 지 불과 몇 일밖에 지나지 않았는 데도 패널 규격 표준화나 상호구매 같은 중대 협력과제와 관련해 이상완 회장과 권영수 수석부회장의 발언이 미묘한 해석 차이를 낳는 등 불협화음의 기미가 감지되고 있다.

일부 산업 분석 전문가들도 디스플레이 상생협력에는 당장 현실적인 장애가 적지 않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의 주력 LCD 패널 규격이 서로 다른 게 큰 문제다. 당연히 두 회사에 공급되는 장비 및 재료 역시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현 단계에서는 표준화 및 상호구매가 어려우며 8세대 라인 이후에나 제대로 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40인치 이상 대형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LCD와 PDP가 경합 관계라는 점도 협회에는 골칫거리가 될 공산이 크다. 특히 양쪽 진영의 기술 진보가 급격하게 이뤄짐에 따라 전선이 뜨겁게 형성되고 있는 터에 공동의 이익을 위해 악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과연 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첩첩이 가로놓인 걸림돌을 넘어 국익을 위한 전략적 동맹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큰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그 이후가 더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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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