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연구개발에 과감한 투자·중진국 진출 '소글로벌화'로 도약 준비

국내 제약업체 A사의 김모 해외사업팀장은 요즘 눈코 뜰새 없을 만큼 업무가 많아졌다. 지난 몇 주 사이 베트남, 필리핀으로 날아가 시장 여건을 살펴본 데 이어 지금은 중국행 출장 가방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A사는 몇 해 전부터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해왔는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이후 더욱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미국의 거대 제약업체들의 공세가 예고되면서 바람 앞에 등불 신세인 내수시장을 벗어나 한시 바삐 수출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제약업계는 농업과 함께 한·미 FTA 타결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산업 분야로 꼽힌다.

의약품 분야 협상 결과의 핵심은 ▲오리지널 신약의 자료독점권 인정 ▲특허 기간 연장 ▲의약품 허가와 특허 연계 등이다. 이는 곧 신약의 특허권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제네릭(Genericㆍ복제 의약품) 제품과 개량신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내 제약업계에는 재앙과 같은 것이다.

한·미 FTA로 제약업계가 입게 될 피해는 엄청날 것으로 관측된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제약업체들의 피해 규모를 향후 5년간 최대 5,000억원 정도로 낮게 추산하고 있지만 업계와 시민단체에서는 최소 1조원에서 최대 5조원 이상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업계의 추정대로라면 국내 제약업계의 생존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폭풍 전야의 제약업계는 망연자실하기보다는 활로 모색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도 제약업계가 획기적으로 체질 개선을 도모한다면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 한·중·일 삼각 네트워크 구축

한·미 FTA에 대한 제약업계의 대응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약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늘려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감하게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것이다.

이 가운데 신약 개발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해외진출이 현재 상황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돌파구라는 지적이 많다.

발 빠른 업체들은 이미 해외로 나가고 있다. 닥쳐올 변화를 미리 읽고 일찌감치 글로벌 경영 체제를 선언한 업체들도 적지 않다.

수년 전부터 글로벌 제약업체로의 도약을 준비해온 국내 1위 업체 동아제약의 경우 중기(中期) 전략으로 ‘소(小)글로벌화’ 및 ‘한ㆍ중ㆍ일 삼각 연구개발 네트워크’ 구축을 추진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우선 소글로벌화 전략은 현재로서도 진출 가능한 중진국시장을 먼저 공략해 글로벌 시장 본격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계산을 깔고 있다. 동아제약이 특히 염두에 둔 지역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중남미 시장이다.

이 회사 홍보실 관계자는 “북미, 서유럽 등 선진국시장은 의약품 기준이 까다로워 당장 도전하기 어렵지만 그 밖의 지역은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판단 아래 소글로벌화 전략을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동아제약은 중진국시장에 적합한 신약을 개발해 해외시장을 확대하는 소글로벌화를 발판으로 현재 4%가 채 안 되는 해외매출 비중을 2017년께는 40%까지 대폭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한ㆍ중ㆍ일 삼각 네트워크 구축은 세 나라 시장을 단일 시장으로 묶어 각국 주요 업체들과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서부터 연구개발,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협력 관계를 이룬다는 전략적 제휴 구상이다.

아직 제휴 파트너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기술력과 마케팅 능력을 함께 보유한 유력 업체들을 중심으로 물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제약업계에서는 동아제약의 3개국 협력체제 구축 시도에 대해 참신하면서도 현실성을 가진 방안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구의 거대 제약업체에 비해 기술력, 마케팅 능력이 한 수 아래인 세 나라 업체들끼리 동맹을 맺는다면 역내 시장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 제약회사의 신약개발 연구소. 최흥수 기자

단순히 수출 시장을 개척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지화’를 주된 해외진출 전략으로 삼은 업체들도 적지 않다. 대웅제약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회사의 해외진출 전략은 이른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으로 요약된다. 현지화를 발판으로 한 글로벌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주요 진출지역은 우선 아시아권으로 잡았다.

이를 위해 현재까지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 4개국에 지사를 설립했으며 인도에는 기술 연구개발 기능을 갖춘 사무소를 열었다. 앞으로는 현지 제약사 인수와 연구소 설립 등도 추진할 계획이다.

또한 인력 채용, 연구개발, 생산, 마케팅 등 전 과정을 현지에서 해결함으로써 완전한 현지화를 이룬다는 방침이다.

한·미 FTA 타결로 제네릭 제품을 기반으로 한 국내 업체들은 큰 타격이 불가피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즉 제네릭 경쟁력을 보유한 업체들에게는 오히려 해외시장 개척의 호기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제네릭 분야 선두권 업체인 한미약품은 해외시장에 적극 진출해 제네릭 전문업체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다져 나간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저렴한 제네릭 의약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며 “제네릭 생산에 노하우가 많은 몇몇 대형 업체들은 내수시장보다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게 훨씬 유리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이스라엘이나 인도 업체들은 제네릭을 앞세워 미국시장 진출에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제약업계의 해외진출 전략이 뜻대로 풀려나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밖으로 나가더라도 그곳에서 거대 다국적 업체들과 다시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한국제약협회 관계자는 “외국 업체에 비해 훨씬 영세한 국내 업체들이 무턱대고 해외에 나간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라며 “기업 규모 대형화, 연구개발 능력 강화, 품질 선진화 등의 전제조건을 갖춰야 해외에서도 승부를 걸 수 있다”고 밝혔다.

■ 품질 선진화 등으로 경쟁력 키워야

현재 세계 최대의 제약업체인 미국 화이자의 경우 매출 규모가 45조원, 연구개발비만 8조원에 달한다. 여기에 비하면 국내 제약업계의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1위 업체인 동아제약의 경우에도 매출 5,000억원 대에 불과하며 연구개발비도 고작 수백억원 대다.

이 때문에 국내 제약업체들이 해외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다국적 업체들과 겨룰 수 있는 ‘기초체력’부터 길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아울러 처음에는 정면승부를 피해 틈새시장을 노리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충고도 적지 않다. 특히 천연물신약, 바이오신약, 원료의약품, 제네릭 등 국내 업체들이 일정한 경쟁력을 갖춘 분야부터 파이를 키워 나가라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업체들은 고유의 경쟁력 우위 요소에 초점을 맞춰 해외시장의 틈새를 노려야 한다”며 “가령 한국 업체들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감안한다면 옛 사회주의 국가 등에 적극 진출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밝혔다.

안방을 내줄 위기에 처한 제약업계가 꺼낸 해외진출 승부수는 과연 어떤 결실을 맺을 것인가. 험난한 원정길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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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제약이 항암제 젬시트의 중국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최흥수 기자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