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마다 판단 기준 모호… 교묘한 술수 부리는 업체 많아 '총성 없는 전쟁'서울대 영문약칭 SUN, 피부미용업체가 선점롯데그룹·롯데관광개발 상호 놓고 집안싸움우리은행, 시중은행들과 1대8 상표권 분쟁

서울대가 요즘 ‘색다른’ 고민에 빠져 있다. 외부에서 보면 색다를지 모르지만 정작 당사자는 꽤나 난감한 듯하다.

서울대가 뜻하지 않은 고민거리에 발목이 잡힌 것은 영문 약칭인 ‘SNU’(Seoul National University) 때문이다. 서울대는 최근 법인화와 지주회사 설립 등을 위해 SNU의 상표등록을 추진하다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됐다. 한 피부미용 업체가 동일한 상표를 2005년에 이미 등록해 놓은 것.

서울대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미 SNU 상표를 등록한 업체와 상표분쟁을 벌이면 승산이 있다는 법률자문에 자신감을 얻어 조만간 대응에 나설 것으로 전해졌다. SNU가 서울대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사실이 워낙 뚜렷하다는 점이 승리를 점치는 근거다.

하지만 서울대의 생각처럼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한 변리사는 “서울대가 SNU의 상표가치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것은 이해하지만 먼저 등록한 업체의 상표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야흐로 상표의 시대다. 잘 만든 상표 하나에 기업이 웃고, 잘못 만든 상표 하나에 기업이 우는 세상이다. 상표(서비스표)는 어떤 기업이 자신의 상품(서비스)을 다른 기업의 것과 구별함을 본질적 기능으로 하고 있다.

롯데그룹과 롯데관광개발은 최근‘롯데’라는 상호를 둘러싸고 집안싸움을 벌였다.
롯데그룹과 롯데관광개발은 최근'롯데'라는 상호를 둘러싸고 집안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상표는 이제 기업 그 자체를 상징하거나 기업의 가치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고 있다.

세계적인 브랜드 조사기관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2007년 세계 100대 브랜드’에 따르면 코카콜라의 브랜드(상표) 가치는 무려 653억 달러를 넘는다. 요지부동의 세계 1위다. 한국 대표기업 삼성의 상표 가치도 168억 달러를 웃돌아 세계 2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코카콜라 또는 삼성이라는 상표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려면 두 회사에 그만한 돈을 지불하고 사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코카콜라나 삼성 상표가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상표 하나에 상상조차 힘든 천문학적 거액을 치를 기업은 없다.

다만 공짜로 어떤 유명상표에 편승할 수 있다면? 아마도 수많은 기업들이 달려들어 그 상표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실제 무상으로 유명상표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란 없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른바 ‘짝퉁’이라고 불리는 유사상표를 쓰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 상표를 둘러싼 분쟁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유명상표의 권리를 지키려는 측과 그 권리를 침해하려는 측의 총성 없는 전쟁이다. 중국 시장에서 삼성이나 LG, 현대 같은 한국 대표 브랜드의 짝퉁이 범람하고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명품 패션브랜드의 짝퉁이 넘쳐나는 것이 단적인 예다.

특허심판원에 따르면 상표권과 관련한 심판청구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심판청구가 증가하는 것은 곧 상표분쟁이 그만큼 빈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002년 3,675건이던 상표 심판청구는 지난해 6,056건으로 4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심판원 관계자는 “매년 상표출원 및 심사건수가 급증함에 따라 심판청구 건수도 덩달아 늘 수밖에 없다”며 “아울러 상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수준이 점차 높아지는 것도 상표권에 대한 경쟁을 가열시키는 주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표분쟁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만 해도 롯데그룹과 롯데관광개발의 ‘집안 싸움’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김기병 롯데관광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지난 8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50부는 롯데그룹 3개 계열사가 “서비스표를 침해당했다”며 농협롯데관광을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으로 농협롯데관광은 ‘롯데’ 또는 ‘LOTTE’라는 표현이 담긴 표장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농협롯데관광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매제인 김기병 회장의 롯데관광개발과 농협교류센터의 합작으로 설립된 여행업체다.

재판부는 “농협롯데관광이 롯데관광개발로부터 ‘롯데’라는 상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낙을 받았더라도, 이는 롯데관광개발을 상대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에 불과할 뿐 가처분 신청 회사에 대항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롯데 계열사들은 지난 6월에도 롯데관광개발을 상대로 “롯데그룹을 나타내는 표장 사용을 금지해 달라”며 롯데 심벌마크의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이러다 보니 시중에서는 “상표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우리은행과 8개 시중은행이 수 년째 벌이고 있는 우리은행 행명 분쟁 사건도 매우 흥미로운 상표분쟁 사례 중 하나다.

지난 7월 특허법원은 신한, 국민 등 8개 은행이 우리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상표등록 무효 소송에서 “우리 은행은 모든 수요자에게 사용이 개방돼야 할 표현이므로 지정 서비스업인 금융업과 관련해 식별할 수 없는 서비스표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8개 시중은행과 1대8로 상표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은행. 사진은 박해춘 행장 취임식.

재판부는 “우리는 ‘우리 어머니’, ‘우리 회사’의 경우처럼 널리 쓰이는 표현이며 다른 은행에서도 스스로를 가리킬 때 ‘우리 은행’이라 할 수밖에 없듯이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판결 이유를 덧붙였다.

지난 2005년 특허심판원은 우리은행이라는 명칭이 상표의 식별력을 갖고 있다고 결정을 내린 바 있어 2심에 해당하는 이번 판결은 특히 눈길을 끈다. 관련업계에서는 이번 소송이 서로 무승부를 기록한 만큼 대법원까지 가봐야 결판이 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8개 시중은행은 ‘우리’라는 명칭이 특정 은행에 의해 독점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우리은행 역시 ‘우리’라는 이름을 이미 수 년 동안 써왔기 때문에 일정한 식별력이 있다고 주장해 서로간 견해차가 뚜렷하다.

이런 가운데 우리은행측은 이번 판결에 대해 즉각 반발, 지난 8월초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한 상태다. 우리은행 법무팀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설령 진다 하더라도 상표를 재출원하면 되기 때문에 ‘우리’라는 상표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어쨌든 ‘우리’와 ‘은행’이 합쳐진 위에 도형까지 더해져 상표의 독자성이 있다는 게 우리의 확고한 판단”이라고 밝혔다.

변리사 업계에서는 우리은행 상표분쟁 사건의 결말을 쉽사리 예단하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양 당사자의 주장이 모두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상표분쟁 사건은 대개의 경우 어느 한쪽의 손을 번쩍 들어주기 힘든 추세로 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상표법의 관련 규정들이 다소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사례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댈 수 있는 기준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대한변리사회의 한 관계자는 “상표분쟁은 답이 없다. 판례를 어느 방향으로 찾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특허심판원 관계자도 “모든 사례마다 핵심 쟁점이 다르기 때문에 심판 과정에서는 각 사례별로 최선의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며 공감을 표했다.

최근 상표분쟁이 빈발하는 데는 저명상표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려는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세계 최대 커피 체인 스타벅스와 국내 중소업체 스타프레야가 맞붙은 상표분쟁에서 법원은 두 상표의 본질적인 유사성이 없다며 스타프레야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이런 업체들 가운데는 상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저명상표와 자신의 상표를 의도적으로 오인 또는 혼동시키는 효과를 끌어내되, 권리침해 시비는 교묘하게 피해나가는 술수를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변리사 업계의 분석이다.

여기에는 국내 기업체들이 지식재산권을 타인의 권리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아직 자리잡지 못한 것도 큰 이유로 지적된다.

한 중견 변리사는 “어떤 업종의 후발주자라면 잘 나가는 선두업체의 상표가치에 대한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나중에 손해배상을 하더라도 당장의 이익을 얻기 위해 상표 베끼기를 하는 경우가 빈발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표 자체가 ‘거래상의 신용’을 보증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사상표로 승부를 거는 업체들은 결국 자신의 신용을 까먹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모두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홍보의 시대. 상표는 기업의 상징과 가치의 척도이자 도덕성의 지표로도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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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