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활동 없이 특허 하나로 글로벌기업 상대 거액 뜯어삼성·LG 등한국의 주력 IT기업도 타깃최근 국내 본격 활동 움직임에 분쟁 주의보

미국의 반도체업체 인텔은 지난 2001년 특허분쟁을 겪고 있었다. 몇몇 기업들이 인텔의 주력제품인 마이크로프로세서(컴퓨터 중앙처리장치)가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법정공방에 휘말렸던 것.

당시 이 골치 아픈 사건을 맡았던 인텔측 변호사 피터 데트킨은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들을 향해 특허권을 이용해 로열티만을 챙기려는 악덕업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그들을 ‘특허괴물’(Patent Troll)로 규정했다.

특허괴물은 통상적으로 특허권을 비롯한 지식재산권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는 특허관리 전문기업을 뜻한다. 이들은 상품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특허권을 확보하고 있다가 다른 기업이 그 특허와 연관된 상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으면 법적인 시비를 걸어 거액의 로열티나 합의금을 받아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난데없는 공격으로 피해를 입는 기업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까닭에 ‘괴물’이라는 부정적 호칭이 붙여진 셈이다. ‘특허 파파라치’ ‘특허해적’ ‘특허사냥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특허정보원 보고서에 따르면 대체로 특허괴물은 특허권을 돈을 주고 매입하거나 원천기술을 보유한 소규모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방식으로 대량의 특허권을 확보한다. 미국에서는 특허경매를 통해 부도가 난 기업의 특허를 사들이기도 한다.

■ 세계 최대시장 미국은 특허괴물의 천국

특허괴물은 제품을 만들어 팔지 않기 때문에 생산시설이나 영업망도 따로 없다. 물론 임직원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개 몇 명의 발명가와 기술자, 특허소송 전문변호사가 전부다.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상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은 ‘특허 천국’이자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다. 미국 특허법은 특허권자의 권리를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게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의 엄청난 위력을 일깨워준 대표적 사건으로는 캐나다의 무선휴대장비 제조업체인 RIM사의 개인휴대단말기(PDA) ‘블랙베리’를 둘러싼 기술관련 소송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2003년 미국의 NTP사는 RIM사의 블랙베리 서비스 일부가 자사의 기술을 무단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특허소송을 제기해 결국 6억1,250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합의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근 NTP사는 버라이즌, AT&T, 스프린트넥스텔, T모바일 등 거대 통신서비스 업체들을 상대로도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해 또 다시 미국 통신업계가 들썩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NTP사는 전형적인 특허괴물로 꼽히는 회사다.

유럽식 이동통신(GSM) 기술과 관련해 미국의 인터디지털사가 글로벌 기업들을 상대로 제기했던 특허소송도 유명한 사건이다. 인터디지털은 지난 2005년 세계 최대 휴대폰 제조업체인 노키아를 상대로 법정공방을 벌인 끝에 2억5,300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아냈다.

노키아에 이어 국내의 대표적인 휴대폰 제조업체인 삼성전자와 LG전자 등도 인터디지털에 꼼짝없이 당했다. 삼성전자는 1억3,400만 달러, LG전자는 2억8,500만 달러를 각각 인터디지털에 로열티로 지불해야만 했다.

■ 인터디지털, 삼성·LG·노키아 등 상대 거액 받아

특히 LG전자는 노키아와 삼성이 소송전에서 맥없이 무릎을 꿇는 장면에 기가 꺾여 싸움 한 번 벌이지 못하고 인터디지털과 로열티 지급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LG전자 관계자는 “인터디지털의 특허기술은 세계적인 표준으로 인정받고 있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소송을 벌이는 것보다 특허사용계약을 맺는 게 비즈니스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해 조속하게 합의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디지털은 최근 국내에서도 대거 특허를 출원하고 있어 그 배경이 주목된다. 이 회사는 1996년 ‘원거리 가입자군을 위한 무선전화 시스템’이라는 특허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1,000여건이 넘는 특허를 한국 특허청에 출원해 그 중 277건을 등록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2002년 무렵까지만 해도 매년 10건 안팎의 미미한 출원 건수를 보이다가 2003년부터 출원 건수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허 전문가들은 국내 통신시장과 주요업체를 본격 공략하기 위한 인터디지털의 사전정지 작업 신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 특허청 관계자는 “인터디지털은 발명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특허괴물로 단정짓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다만 향후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의주시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현재 세계적으로 요주의 특허괴물로 분류된 업체는 대부분 정보통신(IT)산업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IT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어 시쳇말로 돈되는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반도체산업 역시 특허괴물의 주요 타깃이다. 그 동안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 국내 반도체 업체 상당수가 외국 특허괴물에 로열티를 뜯겨 왔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동부그룹의 반도체 계열사인 동부하이텍 장관수 부장은 “한국 업체의 기술에 대해 일본이나 미국 기업이 종종 시비를 걸어오는데 그 중에는 특허권 남용 사례가 적지 않다”며 “우리 회사도 특허괴물의 공격을 두 차례 받았으나 반격을 통해 어렵사리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세계적으로 지식재산권 보호 추세가 강화됨에 따라 특허괴물의 활동 반경은 앞으로 더욱 넓어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실제 특허를 다수 보유한 선진국 기업들이 특허괴물의 행태를 보이는 현상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특허 전문가는 “IT, 반도체뿐 아니라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특허관리 전문기업(특허괴물)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특히 지금까지 특허괴물은 대부분 미국 업체였으나 다른 선진국 기업들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대자본을 앞세워 특정산업의 특허를 싹쓸이하는 ‘특허재벌’이 등장하는 경우를 우려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산업분야에서 한 기업이 특허를 독점하게 되면 다른 기업들의 생산활동을 저해해 전체 경제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로 특허괴물 활동 왕성

미국에서는 특허권 남용의 폐해를 인식해 최근 특허침해 발생시 피해보상 기준을 보다 엄격히 규정한 특허법 개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그 동안 특허소송에 수시로 시달려왔던 대형 IT기업들은 이번 개정안이 특허괴물의 발호를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허청이 주도하는 국제특허분쟁지도 및 분쟁대비 특허맵(map) 사업이 기업들을 특허괴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일정 부분 하고 있다. 이는 세계 각국의 특허소송과 분쟁 발생 가능성이 높은 주요 기술분야에 대한 분석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기업들이 사전 대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잠재적인 분쟁 당사자인 기업 스스로 특허괴물에 대한 철저한 대응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특허 전문가는 “현재 국내 기업들은 일부 대기업 외에는 특허분쟁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형편”이라며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 특허공세에 대비한 사전 예방시스템을 시급히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주요 특허괴물 현황

▲인털렉추얼벤처스=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전 최고기술책임자(CTO) 네이선 마이어볼드와 전 최고소프트웨어설계자 에드워드 정이 2000년 공동 창립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특허괴물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피터 데트킨이 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디지털= 무선통신 분야에서 4,200여건에 달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다수의 세계적인 IT업체들과 특허사용계약을 맺고 로열티를 받고 있다.

▲NTP= 모바일 이메일, RF 안테나 분야 등에서 수십 개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노키아, RIM 등과의 특허분쟁에서 이기며 유명세를 떨쳤다.

▲포젠트 네트웍스= 소프트웨어 분야의 핵심 특허 다수를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확보했다. 어도비시스템즈 등 유력 소프트웨어 기업으로부터 로열티를 받고 있으며, 40여개 PC 제조업체를 상대로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아카시아 리서치= 생명공학 분야를 중심으로 기술개발 및 특허출원을 하고 있다. 47개 기술 분야에서 매년 다량의 특허를 매입하는 것이 눈길을 끈다.

▲오션 토모=특허, 상표, 저작권 등 지식재산권의 인수 및 이전 컨설팅을 전문으로 한다. 2006년부터 특허경매를 주최하면서 경매 방식으로 특허를 매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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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