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상수지 적자폭 확대·소비 위축 등 하락요인 많아역외 투기세력 외환시장 공략… 녹아웃 옵션거래도 한몫

원·달러 환율이 장중 한때 900원대가 붕괴된 31일 오후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분주한 모습으로 거래를 하고 있다.
과거에도 원ㆍ 달러 환율이 하락하던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하락세는 심상치 않다. 급기야 달러는 900 원선마저 무너뜨렸다.

지난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ㆍ 달러 환율은 IMF 금융위기를 겪기 이전인 1997년 8월22일에 899.80 원을 기록한 이후 10년여 만에 처음으로 장중에 900 원 아래로 내려섰다. 그런데다 글로벌 외환시장의 분위기나 서울 외환시장의 추세로 보아 달러 환율의 하락세가 여기서 그칠 것 같지 않으니 더 문제이다.

서울 외환시장의 외환딜러들은 이처럼 환율이 추락한 배경에는 그간 마지노선으로 간주되던 913 원선이 무너진 것이 결정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달러 환율은 과거에도 종종 920 원선을 무너뜨렸고, 심지어 915 원선마저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책당국이 달러 환율을 지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외환시장의 딜러들도 당국의 의지를 일찌감치 눈치 채고는 알아서(?) 달러를 되사들여 환율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설마 무너지지 않으리라 간주되던 913 원이 와르르 무너진 상황이다 보니 다른 지지선들이 버틸 수 없었던 것. 그 결과,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기대되던 900 원선도 일시적이나마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는 거의 ‘ 800 원대 환율의 시대 ’로 접어들 참이다.

환율이 갑자기 급락세를 나타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동안 꾸준하게 하락세를 이어왔던 터. 그리고 그 배경에는 수출업체들의 달러 매도세가 작용하였다. 특히 조선업체들이 선물환 거래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달러 매물을 내놓았고, 그것이 현물환 시장에 유입되어 달러 환율을 끌어내린 탓이 크다. 외환 당국은 기업에 대하여 과도한 달러 매도를 자제할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달러 환율에 따라 수익성이 좌우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권고대로 달러를 매도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가 환율이 더 내리는 날에는 큰 낭패일 수밖에 없다. 환율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꾸준히 달러를 매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형편. 그리고 기업의 달러 매물이 집중되며 1차 마지노선으로 간주되던 913 원선이 무너뜨리자 매물이 매물을 부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만일 앞으로 달러환율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기업들이 서둘러 달러를 매도할 리 만무하다. 기업들이 서둘러 달러를 매도하려는 것은 결국 향후의 달러 환율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달러 환율이 IMF 금융위기를 겪은 이래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로,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가치가 연일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 행정부는 겉으로는 “강한 달러” 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사실상 약한 달러를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도 달러화의 입지는 사면초가이다. 일단 미국의 국제수지의 적자폭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서 정상적인 상황일지라도 달러가 강세를 나타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자국의 통화 가치가 평가절하가 되어야 수출이 늘고 수입이 줄어들어 국제수지의 적자가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은 환율 정책에서 기본인 터. 경상수지 적자폭이 8천억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악화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달러화의 가치가 더 하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기에다 최근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여파로 미국의 금융시장이 흔들리면서 이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달러 금리를 인하한 것도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의 가치를 떨어트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달 미연방준비위원회(FRB)가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폭의 금리 인하를 단행하기 전만 하더라도 달러화는 나름대로 매력적인 투자처였다.

달러화의 기준금리는 5%였기에 다른 통화에 비하여 비교적 높은 금리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국제 금융자본들이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달러화로 몰려들었던 것.

그러나 달러화의 금리가 전격 인하되면서 투자수단으로서의 매력이 사라지자 달러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곧장 달러 매도로 이어졌고, 달러 가치가 외환시장에서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다 부동산 시장이 침체 상태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소비 회복 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는 상황이다. 이것 역시 달러의 추가적인 금리 인하를 예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달러의 가치가 도무지 오를 수 없는 이유이다. 이래저래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가치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하락세를 이어갈 전망이고, 이는 고스란히 원ㆍ 달러 환율에도 영향을 미쳤다.

둘째로,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하락하자 이를 빌미삼아 역외 투기세력들이 우리나라 외환시장을 공략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고 있다.

외환 당국이 역외 외환 투기세력의 달러 매도 공세를 방어하고는 있으나 이들의 끈질기고 집요한 달러 매도 공세로 말미암아 환율이 점점 하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에다 추가적인 달러 환율 하락을 우려한 국내 기업들의 달러매도 물량마저 쏟아지고 있으니 환율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셋째로, 기업들이 환위험을 관리하기 위하여 기존에 체결해 놓은 달러-원 옵션 파생금융상품이 외환시장에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환율을 끌어내리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달러환율은 915~920 원 언저리를 안정적으로 맴돌았기에 기업들은 900 원을 녹아웃 수준으로 설정한 녹아웃 옵션거래를 은행과 많이 체결해놓은 상태이다.

녹아웃 옵션이란 환율이 어느 수준 이하로 내려서면 옵션계약 자체가 녹아웃, 즉 무효가 되는 계약을 말한다.

예컨대 900 원에 녹아웃조건이 있는 옵션의 경우라면 환율이 900 원을 한번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계약이 취소되어 버린다. 그리고 옵션이 취소되면 기업으로서는 졸지에 외환 계약이 날아가 버리는 결과가 된다.

기업은 환차손을 줄이기 위해서 900 원 이하라도 뒤늦게 달러를 매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환율이 900 원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다. 그러나 만일 900원을 한번이라도 건드리면 그 순간 녹아웃 옵션이 발동하기 때문에 시장에 달러 매물이 쌓이고 만다.

물론 한국은행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전력을 다하여 900 원을 방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더구나 900 원대의 환율과 800 원대의 환율은 심리적으로도 느낌이 다르므로 외환당국으로서도 최대한 환율의 하락을 막아야 할 입장이었던 터.

하지만 달러 환율의 하락을 바라는 투기세력으로서는 어떻든 한번이라도 환율을 900 원에 닿게만 하면 거액의 달러 매물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힘들이지 않고 환율을 더 끌어내릴 수 있으므로 역시 환율을 내리는데 힘을 다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일시적이나마 환율이 900 원 이하로 내려갔으니 투기세력의 한판승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녹 아웃으로 무효화된 달러 매물이 시장에 집중될 형편이다.

한번 무너진 지지선은 재차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노릇. 이제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환율이 800 원선에 다시 진입할지 여부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다. 800 원대의 환율에 진입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다만 정부와 한국은행의 노력에 따라 ‘800 원대 환율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은 다소 늦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기의 문제일 뿐, 환율의 하락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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