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가치 하락으로 "모델료·입장료 달러로 안 받겠다" 망신살유로화·캐나다 달러 대비 각각 14·19% 폭락약세 지속되면 유가·원자재 값 상승 부채질

가치가 추락하는 달러보다 차라리 강세가 예상되는 유로화로 모델료를 받겠다고 나선 슈퍼모델 지젤 번천.
러화가 위기를 겪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한다면 ‘달러의 굴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도하 각 언론은 브라질 태생의 슈퍼모델인 지젤 번천이 프록터앤드갬블(P&G)과 모델계약을 체결하면서 모델료로 달러화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유로화를 요구했다는 소식을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그녀는 달러화가 앞으로도 약세를 보일 것이므로 달러보다는 차라리 강세가 예상되는 유로화로 아예 모델료를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젤 번천이 워낙 유명한 모델이기에 모델료를 달러화는 안 된다느니 유로화로 달라느니 요구할 수 있었을 터. 웬만한 모델이라면 언감생심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유럽기업도 아니고, 미국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더구나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가 모델료로 유로화를 요구할 정도라면 그녀의 배짱도 배짱이려니와, 달러에 대한 기피심리가 대단한 모양이다.

그런데 지젤 번천이 유로화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0월, 돌체앤드가바나(D&G)와 향수 모델 계약을 맺을 때도 그녀는 유로로 모델료를 받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달러화의 위치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타지마할 같은 관광지가 많은 인도는 11월부터는 숫제 달러로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물론 인도이므로 당연히 인도 루피화로 입장료를 내는 것이 정상이었겠지만 이제까지는 달러로 입장료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1월부터는 달러를 내는 것은 금지되었다. 타지마할 관광객들은 1달러=50루피를 기준하여 입장료로 5달러를 내었다. 하지만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현재 환율은 1달러=39루피 수준으로 낮아졌다. 결국 관광객 한 명이 5달러를 내고 들어오면 관광 당국은 55루피를 손해 보는 꼴이다. 이런 상황이니 인도 관광 당국으로서는 달러를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다.

또한 모델료나 관광지 입장료 같은 소소한 문제가 아니라, 최근 벌어지고 있는 달러화 약세 추세는 한 나라의 경제정책 기조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중국은 외환보유고의 일부를 달러화가 아닌 유로화 등으로 교체할 것이라고 밝혀서 한 때 국제금융시장에 큰 파문을 던졌다. 약세가 예상되는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가지고 있느니 차라리 강세가 진행 중인 유로 등 다른 화폐로 외환보유고 통화를 다양화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중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입장도 다를 바 없다. 달러를 보유하고 있어보아야 손해라면 외환보유고로서 달러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IMF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고 중에서 달러의 비중은 1999년에는 71% 수준이었으나, 2007년6월말 기준으로는 65% 수준으로 감소한 상태이다.

아울러 쿠웨이트나 사우디 등과 같이 자국통화의 가치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달러 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동 지역의 국가들은 페그제를 이미 폐지하거나 혹은 조만간 폐지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달러가치가 추락하고, 그로 인하여 달러에 연계된 자국의 통화가치도 덩달아 떨어지면서 엉뚱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는 쿠웨이트가 제일 먼저 달러 페그제를 폐지했고, 이어서 6월에는 시리아가 이에 동참하였다.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 정도가 여전히 달러 페그제를 채택하고는 있는데, 이들 국가 역시 달러의 약세 추세가 더 이어진다면 조만간 페그제를 폐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이다.

달러는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위치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혼란한 국제금융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구축된 브래튼 우즈 협정에서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였고 파운드, 마르크, 프랑 등 주요 선진국의 통화가치를 달러에 연결시킬 정도였다. 달러가 중심이었고, 국제 금융시장의 모든 거래는 달러를 매개로 하였다.

그만큼 달러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달러화의 화려한 나날은 ‘잊혀진 계절’이다. 달러는 기피대상으로 전락한 형편이다. 오죽하였으면 심지어 미국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앨런 그린스펀조차 CBS와의 회견에서 "달러로 강연료를 받아도 괜찮다. 받은 달러를 곧 다른 통화로 바꿔 버리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을까.

달러화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올해 내내 하락세를 면치 못하였다. 달러화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를 살피면 2006년10월에 92.9이던 것이 최근에는 82.2 수준으로까지 밀려와 있다.

그러니 정확히 1년의 기간 동안 달러 가치는 12% 가량 하락한 상태이다. 특히 달러는 유로에 대해선 14%, 캐나다 달러에 대해선 19%나 폭락하였다. 지젤 번천이 유로화로 모델료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이처럼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경기 회복세가 예상보다 더디어지면서 강한 달러를 위주로 하는 경제정책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의 회복이 본격화된다면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선제적인 달러 금리 인상도 예상되고, 이는 달러 강세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경기 회복세는 그다지 강력하지 못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신용시장의 경색이 달러 가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금융시장의 불안을 우려한 미국의 중앙은행이 재빨리 달러 금리를 대폭 인하하면서 투자처로서의 달러 매력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그것이 달러 가치의 추락을 이끈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 '강한 달러' 정책은 정치적 제스처

특히 최근에 시티은행을 비롯한 미국의 유수한 투자은행들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손실 상각액을 밝히고 있고, 그 규모가 예상을 넘어서는 대규모로 나타나자 달러화가 강세를 보일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서브 프라임 부실로 인한 손실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신용경색을 우려하여 금융시장이 더 움츠려들 것은 뻔한 노릇인지라, 달러 금리가 쉽사리 인상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르지 않는 한, 달러에 대한 매력은 현저히 낮아지고, 이는 달러 약세 현상을 더 부추기는 요인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로서도 굳이 나서서 달러화의 가치를 강세로 바꿀 이유는 없다. 자국 통화가 평가절하가 지속될 경우, 수출은 늘어나고 수입을 저절로 줄어들기에 국제수지가 개선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 .그렇지 않아도 국제수지 적자폭이 급증하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 정부로서는 오히려 달러의 약세를 쌍수로 환영할 판이다.

미국 정부는 겉으로는 “강한 달러” 정책을 고수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사실상 달러 약세를 방임하고 있다. 덕택에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폭은 2007년9월말 564억 달러로 나타나 2005년5월말 563억 달러의 적자 이후 가장 좋은 상태이다.

따라서 신용시장 경색 우려로 말미암아 달러 금리가 인상될 공산은 낮고, 미국의 국제수지 개선을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가 달러의 약세를 방임하고 있는 형편에서는 달러화의 약세 추세가 더 이어질 것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소위 ‘달러의 굴욕’ 혹은 달러 약세 기조가 지속될 경우, 그 영향은 어떨까? 당장 국제 유가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다. 달러의 가치가 하락할수록 원유 수출대금을 달러화로 받는 OPEC 국가로서는 손해인지라 국제 유가를 쉽사리 인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달러가 약세를 보인다면 이를 대체할 투자수단으로 금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확률은 높고, 덩달아 은, 동, 구리 등에다 옥수수, 원당 등 국제 원자재 가격도 현 수준에서 급격하게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중근 메버릭 코리아 대표 jayk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