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중국 등 '달러재벌'들 막대한 자금력으로 지구촌 돈줄 쥐락펴락한국투자공사는 투자 걸림돌 많아 출범 3년 지났지만 아직도 '워밍업'

세계금융의 중심가인 미국 월스트리트는 지난해 그야말로 역사적인 망신살이 뻗쳤다. 서브프라임 모지기(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이곳의 유수 투자금융 기관들이 손실을 메우고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리는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 2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50억 달러를 중국투자공사(CIC)로부터 긴급히 지원받았고, 씨티그룹도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부다비투자청(ADIA)로부터 75억 달러를 투자받아 유동성 위기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동안 세계금융 시장에서 큰손 중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투자기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중국투자공사와 아부다비투자청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이들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머니파워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는 이른바 ‘국부(國富)펀드’(Sovereign Wealth Fund)다.

국부펀드는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통화당국이 확보하고 있는 외환보유액과 별개로 정부가 외화자산을 따로 조성해 운용하는 투자기구를 지칭한다. 재원조달 방식에 따라 상품펀드와 비(非)상품펀드의 두 가지로 나뉜다.

상품펀드는 원유 등 원자재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로 조성되는 반면 비상품펀드는 국제수지 흑자로 쌓아 올린 외환보유액이나 정부의 채권발행으로 만든 자산으로 조성된다. 이런 분류법을 적용하면 중국투자공사는 비상품펀드, 아부다비투자청은 상품펀드에 포함되는 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07년 상반기 현재 약 30개 국이 국부펀드를 운용하고 있거나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규모는 최대 2조9,000억 달러로 세계 전체 외환보유액 5조 달러의 60%에 달한다는 추산이다.

한국은행은 이 같은 수치가 세계 국채 발행잔액의 12%, 미국 증시 시가총액의 19%, 세계 파생상품 시장의 30%, 인수합병(M&A) 거래규모의 83%에 해당된다고 분석했다. 특히 세계 자본시장을 주물러온 헤지펀드의 전체 자산규모 1조5,000억~2조 달러를 크게 웃돌아 그 엄청난 덩치를 실감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국부펀드가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IMF나 도이체방크, 모건스탠리 등 투자기관의 전망에 따르면 전 세계 국부펀드의 자산규모는 2012년께 5조~8조7,000억 달러에 이른 뒤 그 10년 후인 2022년께는 27조7,000억 달러로 급팽창할 것으로 관측된다.

그렇다면 각국 정부가 직접 펀드를 조성해 돈을 굴리는 국부펀드가 급성장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세계 자본시장의 판도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2004년 이후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중동 산유국 등 원자재 수출국의 재정수입이 넘쳐흐르는 한편 중국 등 신흥시장 국가의 외환보유액도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2001년까지 비교적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던 세계 외환보유액은 2006년 말 현재 5조 달러 규모로 급증했다.

문제는 외환보유액이 무작정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환율관리 등에 따른 비용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수익성 제고라는 새로운 숙제도 수반하기 때문이다. 국부펀드는 바로 이 같은 현실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전 세계 국부펀드는 대부분 경상수지 흑자를 주체할 수 없는 중동 및 아시아의 수출국 등이 운용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비중이 85%에 달한다는 추산이다.

주요 국부펀드의 자산규모는 엄청난 수준이다. 특히 원유로 떼돈을 버는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투자청은 최소 5,000억 달러에서 최대 8,750억 달러에 이르는 자산을 굴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시내 알짜 빌딩을 ‘쇼핑’하면서 국내에도 알려진 싱가포르투자청(GIC)도 1,000억~3,300억 달러의 막대한 자산규모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국부펀드 시장에 새로 진출한 중국투자공사의 경우도 무려 2,000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국부펀드는 대부분 운용 내역이나 성과를 비공개로 하고 있어 정확한 자산규모나 수익률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양대 국부펀드 중 하나인 테마섹의 경우 30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19%에 이르는 등 운용성과가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싱가포르투자청(GIC)도 25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9.5%에 달했다.

국부펀드가 세계 자본시장의 큰손으로 거침없이 질주하자 최근 선진국 사이에는 경계심도 커지고 있다. 국부펀드가 주식, 채권 투자는 물론 알짜 부동산, 주요 기업 매입에까지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자칫 개도국에 뒤통수를 얻어맞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국부펀드 운용의 국제규범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은 상황이다.

이처럼 개도국발(發) 국부펀드 태풍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국부펀드는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못 떼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5년 7월 외환보유액 수익성 제고와 동북아 금융허브 구축이라는 야심찬 목표 아래 한국투자공사(KIC)가 출범했지만 2년 반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요람’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공사의 자산규모는 법적으로 200억 달러(한국은행 위탁 약정금액 170억 달러+외국환평형기금 30억 달러)로 제한돼 있다. 여타 국부펀드에 비하면 초미니 사이즈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수익성보다는 안정성 위주의 투자를 하도록 규정돼 있다. 자산운용의 여지가 그만큼 좁은 셈이다.

이렇게 된 데는 태생적 이유가 있다. 애초부터 외환관리 본산인 한국은행은 한국투자공사 출범을 떨떠름하게 여겼다. 또한 국회에서 관련법을 제정할 때도 설립 반대 의견이 워낙 많아 절충점을 찾다 보니 모든 면에서 위축됐다. 공사 설립을 추진했던 이헌재 당시 재경부 장관은 “고기를 잡기는 했는데 뼈만 남았더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외환보유액을 쥐고 있는 한은의 입장은 여전히 냉랭하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얼마 전에도 “국부펀드의 재원을 외환보유액으로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공개적인 선을 그었다.

한은의 입장은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은 외환시장 안정 등의 목적으로 운영될 뿐 아니라 외화자산에 대응하는 부채가 있어 함부로 전용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투자공사는 국부펀드가 아니다”라는 차가운 발언도 한은 주변에서는 나온다.

이 같은 한국투자공사의 딜레마를 풀려면 결국 다른 곳에서 재원조달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외환보유액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각종 연금, 기금 등 국내 토종자본을 활용하자는 의견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방법도 한국투자공사가 뚜렷한 운용실적을 낸 뒤에, 그것도 연ㆍ기금 이해당사자의 동의를 얻은 뒤에나 가능하다는 점에서 당장 실효성을 가진 대안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다만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한국투자공사의 자금조달 창구를 확대해 해외 자산운용 기반을 정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는 점이다. 과연 경제전도사 이명박 시대에 한국 국부펀드의 족쇄는 풀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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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