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존 하지와 김규식


광복 58주년을 맞는 서울의 모습은 빛찾은 환희가 없다. 광복 후 세대인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8ㆍ15의 감격을 1945~48년 해방정국의 비참한 감회로 맞았다.

”한쪽에서는 주한미군의 일부가 축소 되거나 배치만 바꾸어도 나라의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며 재배치를 반대한다. 일부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주한미군이 나라의 자주권을 침해 한다며 철수를 주장한다.”

”양쪽 모두 지난 날 이념적 대결시대의 논리에 매몰되어 역사와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지을수 없다.”고 경축사에서 밝혔다.

조선일보는 8월 16일자 ‘시청앞 광장, 종로 ‘반미’라고 이날의 대중 움직임을 사진과 함께 실었다. 특이한 것은 노 대통령의 ‘지난날 이념 시대’같은 오늘을 상징하려는듯 1946년 1월 3일에 좌익계열이 서울운동장에서 주최한 찬탁대회 사진을 왼쪽에 실었다.

오른쪽에는 1945년 12월 27일자에 동아일보 1면톱으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활점령”이란 기사를 보고 ‘반탁’에 나선 우익들의 사진을 실었다.

재미 있는 것은 좌익은 “삼상(미국, 소련, 영국)결정 ‘절대지지’, 우익은 “신탁통치 ‘절대반대’의 ‘절대’ 프랏타드를 들고 있는 점이다.

올해의 광복절 동아일보 제목은 “만세 함성 대신 구호만…”이다. 한국일보는 “’남남 갈등의 날’돼버린 8ㆍ15” ‘이념적 대결시대’, ‘좌 찬탁’ ‘우 반탁’ 시대인 1946년은 과연 어떠했을까.

최근에 나온 정신문화원 교수인 점용욱 박사의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에는 이때의 남ㆍ북 조선의 갈등 중 남쪽의 고뇌가 잘 정리 되어 있다.

또한 미국에서 박사 학위과정에 있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통신원인 김개명 기자가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에는 해방정국에서 중도좌파, 우파로 좌ㆍ우의 ‘중간 진영’을 이루려던 9명의 인사가 가슴을 아프게 할 정도로 쓰여 있다.

정용욱 박사는 미 육군 조선 사령관으로 38도선 이남인 ‘남조선’의 점령자며 사실상 통치자였던 존 하지의 해방정국 3년간의 정치를 실증적 자료로 벗겨 냈다.

하지는 1893년 일리노이의 한 시골농장 출생으로 일리노이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고등사관 양성소에서 급문에 들어 섰다. 제1차 대전 프랑스 전선 참전, 2차대전때는 24군 단장으로 모끼나와에서 그 용맹성을 떨쳤다.

한반도 반쪽의 점령군 사령관이 되었을 때 그는 미국과 소련은 대결하기 마련이며 한국은 공산세력인 소련에 빼앗길수 없는 전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반도에 와 느낀 한국민족은 오끼나와에서 싸운 일본인과 같은종류의 ‘고양이족’이며 공산주의가 승리 할 수 있는 조건이 높은곳이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가 군인으로써 미국의 세계전략상의 주요지점인 한반도를 잃지 않기위해 해야할 임무는 정치에서 군인답지않은 공작을 해서라도 미국편인 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김구의 극우세력에 편승하다, 중간파인 중도우파 김규식 중도좌파 여운형과 손잡기도 했다. 이승만과는 등을 돌린 착도 했지만 그건 미국무부의 지휘를 받은 것이지 그가 조선을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후원했다.

점 박사의 결론은 명확하다. 존 하지 미 육군중장은 ‘한국 분단의 씨앗’이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충실한 이행자였다. 한반도의 통일을 정치보다 내전에서 승리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의 은퇴후 밝힌 소감은 유의 해 볼만 하다. “미국 점령정책의 성공으로 이익을 볼 사람은 극우파지만 그들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는 비록 정치공작면에서지만 임점 부주적으로 귀국한 김규식(1881~1950. 미 버지니아 로록 대학)를 반탁에 나선 이승만과 김구의 극우를 제칠 제3세력, 중간파로 판단, 그를 민주의원 의장을 시키고 좌ㆍ우 합작위원회 의장을 시키며 도왔으나 결국 그를 버렸다.

김재명 기자는 결론 내리고 있다. 이승만 박사는 ‘형님’이라 불렀던 김 의장은 삼청장에 머물며 ‘해방정국’을 ‘통일정국’으로 끌고 가려다 실패한 지도자로 보는 것이다.

김규식은 1948년 4월의 남ㆍ북협상에 김구와 함께 갔지만 그의 진심속에는 “소련에도, 미국에도 기울지 않은 한나라당 조선으로 한반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비서였던 강원홍 목사는 “정치인 보다 서울대 총장을 했었으면…”이라고 김재명 기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김 기자는 김 의장을 “’민족의 하나됨’이라는 이상?위해 양심을 버리지 않은 분단시대가 낳은 비극적 인물의 한정형( )이다”고 표현햇다.

’해방정국’이 어떠했냐를 알고픈 이들은 정용욱의 ‘존 하지와…’ 김재명의 ‘한국 현대사 비극’….”를 읽기를 바란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념적 대결’시대가 얼마나 정략적이요 공작적이었냐를 알기 위해서 필독 했으면 한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09-30 15:41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