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미국은 지금 전쟁 중인가?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비자와 안전 검사를 다시 실시하겠습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단행한지 나흘째인 24일, 로스앤젤레스행 KAL 011편의 탑승 과정은 까다롭고 짜증스러웠다. 테러 용의자 마냥 X-레이 검색대 통과를 위해 구두까지 벗어야 했고, 항공기 탑승 직전에 승무원의 정중한(?) 요구에 의해 휴대품 검사가 다시 이뤄졌다.

또 비행기 이륙 후 30분 동안 누구도 좌석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안내방송도 나왔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에 나서면서 혹 있을 지도 모를 ‘테러형’ 반격에 얼마나 부담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며칠간 TV 화면을 통해 게임을 즐기듯 이라크전을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미국을 중심으로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10시간을 날아 LA에 도착하면서 미국이 전쟁의 한 당사자인지 의심케 하는 장면들이 잇따랐다. 검역당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확산되고 있는 괴질에 대한 주의사항을 적은 메모지를 일일이 나눠주며 주의를 당부했다.

출입국 당국은 의례적인 질문을 던진 뒤 “엔조이(enjoy)!”라며 꽝 하고 입국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세관 검사 역시 “신고할 것 있느냐?”,“ 없다”로 끝났다. 그 어느 순간에도 ‘전쟁’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미국은 지금 전쟁 중인가? 그렇다. 속전속결을 장담했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이라크 전선에 이상 조짐이 나타나면서 이라크 공습을 강화하는 한편 텍사스 주둔 보병 4사단을 투입하는 등 병력증강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에 비친 LA 등 미 서부지역은 전쟁 중이라는 말을 무색케 한다. 17도를 넘나드는 쾌적한 날씨에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주말이면 주요 해변가로 몰려드는 레저용 차량들까지, 서부는 봄을 즐기는 중이다.

길거리에서 만난 미국인들도 “전쟁은 전쟁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며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는 게 아니잖느냐”고 되물었다. LA 코리아 타운에서 만난 교민들도 “방송을 보지 않으면 미국이 지금 전쟁 중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미국 본토에서는 TV등 언론만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주요 신문 1면에는 불타는 바그다드나 진격 중인 미군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았고, ABC 등 공중파 방송들은 ‘America in Iraq’, ‘America at War’, ‘War with Iraq’ 등 뉴스 특집을 내보내며 전쟁을 중계하느라 바쁘다. 자욱한 모래벌판에 선 특파원들은 슬로우 비디오 화면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전황을 실감나게 전한다.

방송들은 거의 국민의 애국심 고취에 사력을 다하는 듯하다. 미군 5명이 이라크군에게 포로로 잡힌 다음날, 모든 방송은 텍사스 펜실베이니아 등 포로들의 고향으로 마이크를 넘겨 가족 및 친지들을 화면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곤 위험에 처한 아들과 딸들이 그동안 얼마나 용감했으며 국가와 가족을 위해 살아왔는지 전하며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전사자들의 경우는 한술 더 떴다. 이라크 남부 움카스르에서 작전 중에 처음으로 전사한 해병 제1사단 소속 테럴 셰인 칠더스 소위는 “죽어야 한다면 전투 중에 죽기를 바랐다”는 동료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어려워지면서 미 국민의 관심은 점차 엷어지는 느낌이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부상병이나 전사자들의 운구 장면은 생각하기도 싫은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키면서 외면하고픈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그 감정은 어느새 채널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번 이라크전을 ‘제2의 베트남전’이 아닌 보스니아-코소보전, 최소한 아프간 전쟁처럼 끝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라크는 보스니아와 아프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스니아와 아프간에는 밀로셰비치 정권이나 탈레반 정권의 전복을 노리는 강력한 반체제 세력이 존재했으나 이라크에서는 믿을 만한 반 후세인 세력이 없다.

미국은 전쟁 개시와 함께 후세인 대통령의 위상이 흔들리면 아래로부터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반미감정만 쌓여가는 중이다. 게다가 미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반전시위는 날로 거세지고 있다.

국익을 바탕으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는 식의 TV 전황 중계가 아랍의 알 자지라 방송에 의해 깨지면서 미 행정부의 심리전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번 전쟁은 미국 국민이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인가”를 되묻는 순간 끝나게 될 것 같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 2003-10-01 14:15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