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기자는 영악한 북극 곰?


장수천 강금원 안희정 이기명 구조라리 백승택 박연차 민상철 여래리 윤동혁 선봉술 박상훈 오아시스워터 김남수 이성면…. 노무현 대통령이 운영한 생수회사의 보증 채무를 변제하기 위한 지인들의 호의적인 땅 매매와 형 건평씨의 부동산 투기 의혹과 관련된 복잡한 땅 거래, 그리고 청와대 해명 과정에 등장한 인물과 지명들이다.

독자들은 이 사람들이 대통령의 측근인지, 호의적 지인인지, 또 지명과 어떤 식으로 얽혀 있고 돈이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 갔는지 헷갈릴 것이다. 언론들이 앞다퉈 떠들다 보니 귀에 익은 이름들인데, 대부분 누가 누구인지 정리가 안 되는 상태에 빠졌다.

건평씨의 거제도 구조라리 별장ㆍ카페 불법 건축 의혹에서 촉발된 이번 사태는 생수회사 장수천의 부채 해결에 동원된 노 대통령 전 후원회장 이기명씨의 용인 땅 거래에 ‘위세와 돈’이 얽히면서 청와대와 야당ㆍ언론간의 진실 게임으로 탈바꿈했다.

일반 국민이야 굳이 그 과정을 세세히 알아야 할 이유가 없지만, 의혹을 추적 보도하는 언론(기자)으로서는 등장한 이름 하나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이 사태가 노 대통령의 처신과 도덕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스캔들 수준에 그칠 지, 대통령의 권위와 리더십을 훼손하는 ‘~게이트’로 연결될 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딱히 정치적 스캔들과 게이트를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게이트는 닉슨 전 대통령을 퇴진시킨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을 패러디한 만큼 정국을 뒤흔드는 폭발력을 지닌 권력형 비리 사건을 지칭하지 않나 싶다. 단순한 정치적 스캔들과는 다르다.

백악관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로 대배심 증언대에 섰던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은 여전히 ‘스캔들’로 불린다. 증언 직전 ‘지퍼게이트’, ‘배꼽게이트’란 신조어가 등장했지만, 개인 사생활인 탓인지 스캔들 수준에 그쳤다. ‘제2의 워터게이트’사건이 될 뻔(?)한 ‘이란-콘트라 사건’---레이건 미 행정부가 금수 국가였던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에게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 반군을 지원했던 사건---도 국익 논란 때문에 ‘스캔들’자리를 지켰다.

반면 우리는 웬만한 권력형 스캔들에도 ‘~게이트’란 말을 쓴다. DJ 정권에서는 ‘이용호 게이트’ 등 숱한 게이트가 있었고, 참여 정부 들어서는 ‘건평씨 게이트’가 등장했고 곧 ‘장수워터 게이트’, 혹은 ‘용인 실버 게이트’란 신조어가 나올 것 같다.

게이트의 시조격인 워터게이트(호텔) 부정 도청 사건을 파헤친 주역은 언론이었다. 이 때 미국에서는 ‘기자는 사냥개 같다’는 말이 돌았다. 권력형 비리의 냄새를 잘 맡고, 한번 물었다(추적했다) 하면 끝장을 낸다는 뜻이다.

한국의 기자는 어떨까? 취재원과 소주나 마시며 기사를 빼주는 애완견일까? 워터게이트 사건을 터뜨린 사냥개일까? 둘 다 그럴싸하지만 우리의 언론 환경과 특성으로 보면 ‘북극곰 같다’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

북극곰은 영악하면서도 사납다. 얼음 덩어리를 서핑 보드처럼 타고 다니며 먹이를 잡아 채는 장면을 보면 그 감각적 생존 본능에 감탄하게 된다. 또 팔다리가 짧고 배가 불룩 나온, 순진한 모습은 인기 있는 캐릭터로 그만이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마스코트가 바로 북극 곰 ‘미샤’였다. 훈련된 미샤는 지금도 모스크바의 국립 서커스 무대에 올라 관객 앞에서 갖가지 재롱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지만 우리 언론은 독재정권 시절, 독자들 앞에서 서커스 무대위의 미샤처럼 공놀이도 하고, 장애물도 통과하는 등 재롱을 떨었다. 가끔 야생적인 기질을 드러내다가도 곧 채찍과 당근에 고분고분해지곤 했다.

이런 언론을 노 대통령은 ‘언권유착’으로 보고 ‘소주 마시며 기사 빼 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서커스 무대의 미샤를 야생으로 돌려보냈으니 백번 잘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화했다. 야생으로 돌아온 미샤는 이제 영악하고 사나운 북극 곰이다.

최근의 의혹 사태를 보면서 노 대통령은 언론을 야생으로 돌려 보내 놓고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건평씨 의혹이 불거지는 순간, 사냥개에 비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몰아 붙이는 게 ‘야생 언론’이다. 이런 곰을 피하는 방법은 그냥 죽은 체 하고 엎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3차례나 형과 용인 땅 의혹을 해명하면서 언론에 불만을 터뜨렸다. 범법행위가 없는 통상적인 거래를 ‘왜 그렇게 물고 늘어지느냐’는 것이다. 권부 주변에 나도는 의혹은 모두 야생 곰의 공격 대상인 줄 몰랐다면 너무 순진하게 미샤를 숲으로 돌려보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건평씨 의혹을 터뜨린 김문수 의원은 주간한국과의 회견에서 “청와대가 가만히 두었으면 관심이 식었을 걸, 도덕성을 위해 해명하려다가 더 꼬였다”고 말했다. 한마디 덧붙이자. 청와대는 너무 성급하게 미샤를 야생으로 돌려 보냈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3-10-02 14:53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