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2003년 서울, 93년 모스크바


일요일이었던 93년 9월26일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집회 3개가 거의 동시에 열렸다. 공산당 주축의 의회(최고회의)를 해산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와 반대 시위, 그리고 세계적인 지휘자인 무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붉은광장에서 가진 야외 콘서트였다.

차이코프스키 서거 100주년 기념 야외콘서트에는 그의 ‘1812년 서곡’을 듣기 위해 1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 광장에서 불과 1㎞가량 떨어진 모스크바 시청앞에는 옐친 지지 시민 1만여명이, 벨르이 돔(화이트 하우스ㆍ의사당) 주변에서는 3,000여명의 옐친 반대 시위대가 각기 다른 구호를 외쳤다. 모스크바의 이날 모습은 국정 혼란에 대한 시중 여론을 보여주는 척도나 다를 바 없었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인 2003년 9월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명한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 임명 동의안이 부결됐다. 청와대와 친노(親盧) 신당은 “헌법적 권한을 남용한 구태정치의 전형”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감정적 공조정치”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고, 야당은 “코드를 앞세운 ‘노무현식 정치’가 낳은 결과”라고 맞받았다. 국민은 싸우기만 하는 정치보다는 전날 55호 홈런을 터뜨린 이승엽 선수에게 환호를 보냈다.

무려 10년이란 시차를 둔 모스크바와 서울의 풍경이 무척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의회와 갈등의 정점에 서 있는 대통령과 그런 정치에 식상한 국민, 그리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국정 혼란과 파국 조짐….

그러나 그 성격은 다르다. 모스크바의 갈등은 옐친 대통령이 92년 벽두부터 낡은 소비예트 체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해 급진개혁의 시동을 걸면서 시작됐다. 나중에 옐친의 최대 정적이 된 하스불라토프 의장이 이끄는 의회는 ‘옐친식’ 급진개혁이 국민 공동체의 삶을 황폐화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헌법적 권한을 활용해 대통령이 공표한 민영화 촉진 포고령의 효력을 정지시키기도 했다. 참다 못한 옐친은 1년8개월여만에 전격적으로 의회 해산이란 쿠데타적 조치를 취했고, 의회도 대통령을 탄핵하는 등 정국은 가파른 파국으로 치달았다. “붉은 궁전(옐친)과 벨르이 돔(의회)이 권력 다툼에 몰입하면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된 게 이즈음. 국민도 두패로 나뉘었다.

의회를 포위한 탱크가 불을 뿜을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경악했던 때가 93년 10월4일이었다. 옐친은 탱크로 의회를 장악했고 뒤이어 발표한 대 국민연설에서 새로운 국정 운영의 틀을 제시했다.

서울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낡은 정치의 타파를 내세워 소위 ‘코드정치 실험’에 들어가면서 ‘거야(巨野)’ 한나라당 주도의 의회와 갈등은 시작됐다. 그리고 지역통합이란 명분하에 ‘동진(東進)정책’을 추진하면서 정치 지형은 ‘신4당 체제’로 개편됐고 노 대통령은 취임 7개월여만에 스스로 3야(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의 포위망속에 갇혔다. 윤 감사원장 후보의 인준안 거부도 그렇게 보면 노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전략에서든, 정치권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간 탓이든 정치 지형이 달라졌다면 그에 맞는 인식을 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안돼도 좋다”며 밀어붙이는 ‘노무현식’ 정치는 결과적으로 의회를 향해 포를 쏘는 무모한 ‘옐친식’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특히 ‘내가 옳다면 무조건 정(正)’이라는 사고는 위험하다. 독재형이다. 민주주의는 표든, 의석이든 ‘수의 정치’임을 잘 아는 율사 출신 아닌가?

2003년 서울은 93년의 모스크바가 아닌 만큼 감사원장에 대해 국회 동의 절차를 둔 민주적 시대 정신에 따라 윤 후보의 동의안 부결은 의원들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른 것이므로 존중돼야 한다. 이를 ‘대통령 발목잡기’로 몰아 의회와 대립하는 청와대의 태도는 소수정권으로서 정국을 풀어가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더욱이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명분으로 삼거나 의회로부터 핍박 당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 주려는 정략적 사고를 하고 있다면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과거의 옐친이나 DJ처럼 핍박 당하는 이미지로 대통령 자리에는 오를 수 있을지언정 ‘성공한 대통령’으로 우뚝설 수는 없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의 정치 수준은 아직 노 대통령이 의도하는 곳까지 이르지 못했다. “국민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국회도 국민의 뜻에 따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대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좀더 유연한 자세로 의회를 설득하고, 국정 안정을 꾀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의 정치 풍경은 이제 모스크바와 달라야 한다.

이廢?부장


입력시간 : 2003-10-06 18:32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