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대통령이 뭐길래?


2003년 가을은 우울하다. 남해 지역을 강타한 태풍 ‘매미’로 여지껏 두 다리를 편히 뻗지 못하는 수재민들의 심사를 헤아리다 보면 화창한 가을 날씨를 즐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골 깊은 불황은 IMF 위기 때에 이어 도시 서민들에겐 가슴 서늘한 ‘명퇴 바람’을 몰고 왔다.

명퇴 저지선은 이제 오륙도(56세까지 남아있으면 도둑놈), 사오정(45세 정년)을 넘어 삼팔선(38세에 다시 선택)까지 내려갔고, 한때 TV게임으로 인기를 끌었던 삼육구(36세까지 구해두지 않으면 후회)란 용어도 유행할 태세다.

경제는 여전히 바닥이어서 ‘명퇴바람’이 3040 직장인들에겐 ‘절망의 바람’으로 변하는 판에 SK그룹이 대선자금으로 100억을 주었니, 당선 축하금으로 10억을 건넸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다들 도둑놈”이라며 입맛을 다시게 되는데, 웬걸, 매미급 ‘정치 태풍’마저 들이닥쳤다. 노무현 대통령이 20년 측근의 비리 혐의 등에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재신임을 묻겠다는 폭탄 선언이다.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을 이끌 밑천이고, 국민은 의혹 없는 깨끗한 대통령을 원한다. 어정쩡한 태도로 책임을 모면한다면 국민이 무슨 희망을 갖겠나”는 대통령의 발언은 ‘100억’ ‘10억’ 하는 정치권 ‘머니 게임’에 열 받은 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문제에 북한 핵, 송두율 교수의 색깔 논쟁, 실업 등 우리를 짓누르는 나라 안팎의 형편이 ‘1회용 시원함’을 느끼기엔 여유가 없는 탓인지 ‘아슬아슬하더니 결국 사고를’이라는 반응도 주변에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도 사고를 쳤다는 쪽에 선다. 그동안 ‘못해먹겠다’ ‘언론만 보면 제대로 돌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이라는 대통령 발언은 ‘내탓’이 아니라 모두 ‘네탓’이라는 편리한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재신임 선언도 예외가 아니어서 당초에는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의 비리에 대해 ‘싸나이’답게 책임을 지겠다는 듯하더니 바로 ‘국정혼란은 야당과 언론의 탓’이라고 말을 바꾼 근저에는 ‘네탓인데 나보고 물러나라고 할까’라는 배짱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재신임 선언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하지만 홧김에 저지른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언론기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투표가 치러질 경우 재신임 응답이 불신임보다 높았다. 전통적인 안정희구세력에 반 한나라당 민심, 20대 젊은 층이 재신임쪽으로 기운 까닭이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필자도 재신임 쪽이다. 성질대로 한다면 그만두라고 한번 내질러 버리고 싶지만 그게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천명하는 도덕적 우월성에 동의하거나, 안팎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승부수를 지지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겨우 1년 전에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불명예 퇴진시키고 다시 대선을 치러야 하는 사회경제적 비용이 너무 아까워서다.

경제 위기가 심각할수록 정치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해야 하는데, 그 북새통 같은 대선을 다시 치른다면 후유증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열심히 하겠다고 해서 뽑아주었더니, ‘너희들 자꾸 그러면 난 안해’하며 사실상 국민에게 협박(?)하는 판인데, 또 누구를 뽑은들 그렇게 안되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것은 취임식에서 반드시 지킬 것임을 선서한 대통령의 책임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한 무책임한 행위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재신임-도덕성 회복-대선자금 수사-내년 총선승리-정치개혁 추진-성공한 대통령 이라는 최선의 시나리오를 머리에 그렸음직하다. 국민의 재신임을 얻으면 이를 바탕으로 정치자금 수사에 들어가고, 그럴 경우 대선 총선에서 돈을 만진 당사자들이 모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추풍낙엽 신세가 될 터다. 대통령이 한쪽 발을 담근 통합신당은 구 세력과의 차별화에 성공해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여론조사에 담긴 국민의 깊은 뜻이다. 한국일보 여론조사(10월13일자)를 보면 ‘노 대통령을 재신임하겠다’(52.4%)가 ‘국정수행을 잘못하고 있다’(65.1%)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국정수행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을 재신임해야 하는 국민 대다수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그걸 자신에 대한 국민의 포괄적 지지로 여겨 지금까지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국민에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금 추락하는 국정수행 능력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국민투표와 같은 단발성으론 부족하다. ‘네탓’이라는 사고를 바꾸고, ‘코드 정치’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 시급하다.

‘대통령이 뭐길래, 국민과 나라를 볼모로 정치 도박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시중 여론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도 원하지 않지만, 걸핏하면 그만두네 마네 하는 무책임한 대통령도 싫어한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3-10-15 11:11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