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저주들의 행진


스포츠를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도 요즘은 포스트 시즌 막바지에 이른 프로야구에 무시로 눈길이 간다. 한미일 3국의 프로야구가 일제히 ‘2003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열전을 벌이고 있는데, 그 과정이 무슨 마법을 풀듯이 온갖 화제거리를 만들어내며 명승부를 거듭한 탓이다.

언론도 밤비노의 저주니, 염소의 저주니, 호시노 효과니, SK의 대반란이니… 하는 알듯말듯한 용어를 써가며 눈과 귀를 잡아채니 버틸 재간이 없다.

이런 호들갑도 스포츠 마케팅의 하나이겠지만 유난히 징크스가 심한 스포츠의 특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승자와 패자의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되고, 순간순간 강한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스포츠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경기 전날 팬티를 갈아입거나 수염을 깎지 않고, 신발이 뒤집어지지 않게 하는 것 등이 개인 징크스에 속한다면 팀 전체로는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영구차를 본다거나, 스쿨버스를 추월한다거나, 기차가 통과하는 철교 밑을 지나면 이긴다는 것등이 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 프로야구 최고의 영웅 베이브 루스의 전기 ‘베이브(Babe)’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은 구장으로 갈 때 빈 통을 보면 신통하게도 안타를 치곤 했다. 팀 전원이 타격 부진으로 고민하던 어느날 빈 통을 가득 실은 마차가 앞을 지나갔다.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 전원 안타를 기록했는데, 알고 보니 타격 감각을 살리기 위해 감독이 빈 통 수레를 연출한 것이었다. 베이브는 ‘감독이 미신(징크스)을 미신으로 제압하고, 승리를 얻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라고 적었다.

재미있는 것은 베이브가 2003 미 프로야구의 포스트 시즌을 시끄럽게 만든 미신의 한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1916년과 18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보스턴 구단주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올릴 뮤지컬 제작비 마련을 위해 특급 왼손투자이자 홈런타자인 베이브 루스를 12만5,000달러에 양키스팀에게 넘겼다.

그 후 지금까지 보스턴팀은 4차례 월드시리즈에 나갔으나 매번 이상한 일이 일어나며 7차전에서 져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트레이드 전 20년간만 해도 보스턴은 월드시리즈 무패ㆍ최다우승(5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밤비노(루스의 애칭)의 저주’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저주는 또 있다. 시카고 컵스를 따라다니는 ‘염소의 저주’다. 1945년 디트로이트와의 월드시리즈에서 한 팬이 염소를 데리고 구장에 입장하려다 저지당하자 “앞으로 컵스 홈구장에서 월드시리즈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분 데서 비롯된 것인데, 그 해 디트로이트에 3승4패로 진 시카고 컵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저주를 받은 두 팀이 나란히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에서 챔피언전에 올라 ‘…저주’란 징크스가 더욱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두 팀은 끝내 그 저주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운명적 징크스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것도 다 이긴 게임을 팬의 파울 볼 접촉(시카고)과 에이스 투수(보스턴) 때문에 역전패를 당해 ‘저주는 영원하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두 팀은 저주를 풀기 위해 미신도 동원했다고 한다. 보스턴은 2년 전 세계의 지붕이라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팀의 모자를 묻었고 시카고 컵스팀을 저주했던 팬의 조카는 그 저주의 혈통을 이어받은 염소를 데리고 구장에 나타나 저주를 푸는 의식을 베풀었다.

최첨단 문명의 세기에 무슨 그런 일이 있는가 싶지만, 아직도 인간은 자연의 섭리와 운명, 길흉화복을 점치는 미신 앞에서는 약한 존재다.

서구사회에서 ‘13일의 금요일’을 여전히 불길한 날로 꺼리고, 4자(字)를 죽음과 연상시켜 병실 번호 등에서 제외하고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거나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면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에서도 좋은 일을 전할 때 악마가 시기심에 방해하지 않도록 나무로 된 물건을 세 번 두드리는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미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뉴욕증시에서도 10월엔 투자가들이 긴장한다. 10월 마지막 날은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인데, 공교롭게도 뉴욕증시 사상 가장 큰 두 번의 폭락이 1929년, 1987년 10월에 일어났고, 다우지수를 산출한 이래 일일 낙폭 상위 20위 중 8번(40%)이 10월에 몰려 있다.

증시 폭락은 유령이 찾아온다는 할로윈 데이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지만 투자심리는 마치 미신에 홀린 듯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증시 역시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승패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3-10-21 15:32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