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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검찰이 바로서야 나라가…


러시아의 정치 상황이 최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이 임기가 몇 개월 남지 않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한번은 거쳐야 할 정치 게임의 성격이 짙었다. 한마디로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인데, 정치권 내부의 권력 투쟁이 아니라, 대통령과 재벌간의 싸움이었다는 게 흥미롭다.

푸틴과 대립 각을 세운 재벌은 미 포브스지에 의해 세계 26번째 부자(80억 달러)로 선정된 올리가르히(재벌 총수)인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사장이다. 두 사람의 대치 과정을 보면 전형적인 후진국형 싸움이다. 재벌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한 검은 돈의 출처를 묻지 않는다’는 푸틴의 통치 철학에 반기를 들었고, 권력은 즉각 응징에 나선 형국이다.

죄목은 호도르코프스키가 과거 국영기업을 민영화할 때 탈세 등 부정을 저지른 혐의지만 실제로는 ‘괘씸죄’다. 순탄하게 재선의 길로 가고 있던 푸틴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이다. 야당측에 총선 및 대선 자금을 제공하고, 스스로 대권을 쥐려는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았으니, 러시아 정치 권력의 속성상 호도르코프스키가 교도소로 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총대는 역시 연방 검찰이 맸다. 권력의 시녀라는 ‘정치 검찰’의 전형이다.

호도르코프스키도 권력으로부터 탄압 받는 이미지로 올리가르히의 나쁜 선입견을 씻어냈으니 손해본 것은 없는 듯하다. 러시아 정치평론가들은 그를 두고 “구속 전에는 모두가 미워하는 올리가르히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정치 거물이 됐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손으로 가장 위험한 정적을 만들어 냈다”고 지적한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정치 자금, 즉 돈으로 시작됐다. 10여년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늘 정치권에 빼앗기느니 내가 한번 해보겠다’며 대권 도전에 나섰듯이 호도르코프스키도 12월 총선과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돈가믐에 시달리는 야당측에 정치자금을 대주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견제에 들어갔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야당 탄압’이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호도르코프스키의 구속은 야당측으로 흘러 들어가던 재벌의 돈줄을 막는 확실한 효과를 낼 것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선거에는 돈이 필요하다.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내년 대선은 ‘돈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판이다. 앞으로는 선거 때 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그 나라 민주화의 척도가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지난 12ㆍ19 대선에서 돈 문제로 여야간에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오히려 더 많은 자금을 거뒀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노태우 후보와 ‘3김’이 박빙승부를 펼쳤던 87년 대선에선 정치 자금이 무려 조(兆) 단위를 넘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갈수록 그 규모는 줄고 있다.

12ㆍ19 대선의 경우 검찰의 수사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여야 모두 많아야 1,000억원을 크게 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추정이다. 그러나 SK비자금 사건으로 미뤄보면 대선 때 암암리에 돌아다닌 ‘눈먼 돈’이 적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선거 때만 되면 고개를 내미는 ‘눈먼 돈’을 추방하는 일이다. 흔히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되는 대선 자금을 본격적으로 수사하려는 검찰의 움직임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하다.

검찰은 조만간 판도라 상자를 쥐고 있는 민주당 선대위 총무본부장 출신의 이상수 열린우리당 총무위원장과 한나라당의 전 사무총장 김영일 의원을 소환 조사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대선 당시 자금 관리자로, 또 사무총장으로 당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훤히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검찰에서 무엇을 어떻게 꺼내느냐에 따라 검찰 수사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다. 나아가 이번 대선 자금 수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위원장과 김 의원이 순순히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정치적 운명은 물론, 소속 정당의 앞날이 달려 있기 때문에 검찰 조사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진술하려 할 것이다. 검찰의 역할이 중요한 것도 이 대목이다.

검찰로서는 오랫동안 조직을 짓눌러온 ‘정치 검찰’이란 오명을 벗어 던질 기회를 맞았다. ‘살아 있는’ 권력의 돈줄을 수사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닐테지만, 국민이 이번 수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수사가 끝난 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인 불공정한 기획수사라느니, 야당을 표적으로 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 검찰도 대선을 앞두고 야당 손보기에 동원된 러시아 검찰과 다를 바 없다. 대검 중수부에 국민의 격려가 쏟아지는 것도 ‘살아 있는 권력’에도 똑같이 칼을 대는 용기와 노력을 높이 산 것이다.

DJ는 취임 초 ‘검찰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고 했다. 그는 아들들의 비리 사건 연루로 불행한 대통령이 됐지만, 그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3-11-1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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