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외국인들이 비자금을 좋아한다고?


“요즘 검찰이 재벌에 대해서 고강도 비자금 수사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외국계 투자기관의 한 고위 인사가 최근 사석에서 먼저 이렇게 물어왔다.

“검찰을 적극 지지합니다. 재계의 주장처럼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번 기회에 정경유착의 고리를 확실히 끊어내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경제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칠 겁니다.” 평소 소신을 밝히면서도 내심 이 인사와 한바탕 논쟁을 벌여야 겠구나 싶었다.

헌데 이 인사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한 술 더 떴다. “저는 검찰 수사가 경제에 단기적으로라도 악영향을 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데요.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 줬지.” 혹시 개인적인, 아주 특별한 취향이 아니냐는 반문에 “한번 외국 투자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보라”고 되받았다. 열이면 아홉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의 설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참여연대 등 진보 성향의 시민 단체들 주장과도 맥이 닿아 있었다. 외국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지배구조나 회계의 불투명성인데, 이번 수사로 한국 기업 및 경제에 대한 투명성은 한층 제고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강도가 높아지면서 여론은 ‘비자금 수사 = 경제 악영향’의 등식이 공식화한 느낌이다.

“기업 총수가 검찰에 소환되는 것만으로도 대외신인도가 추락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린다” “도피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재벌 총수들을 마구잡이 식으로 출국금지하는 것은 경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치다” 보수 여론들은 마치 재계의 대변자라도 되는 듯, 혹은 마치 사회적 약자를 배려라도 해야 한다는 듯 연일 재계에 대한 국민의 동정심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자신들의 주장만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일까. 한결같이 ‘외국인 투자 기피’ ‘대외신인도 하락’ 등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외국인들의 평가를 등에 업는다. 뒤집어 보면 외국인들은 마치 비자금을 좋아한다는 표현 같기도 하다. 그들의 결론은 이렇다. “고해성사 후 이번 한 번은 면죄부를 줘야 한다.” “검찰 수사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하루 빨리 끝내야 한다.”

이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장담하건대, 5년 뒤 한국 사회는 또 다시 비자금 정국에 휘말려 있을 테다. 그리고 재계와 보수 여론은 지금과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을 것이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1-25 15:29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