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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려니


아침에 신문보기가 두렵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니, 두렵다기 보다는 답답하다는 게 정확한 심정일 게다. 썩 유쾌하지 못한 권력 주변 이야기, 비자금 수사망에 걸려드는 대기업 총수들, 특검법 도입을 둘러싼 죽고살기식 정치권 공방,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테러 소식, 결국 현실로 나타난 카드사 괴담, 숨통을 죄는 38선 명퇴소식에 청년 실업, 막가는 화염병 시위에 족집게 학원강사의 수능 커넥션 의혹까지 어느 하나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기사가 없다.

거기다 일생에 만져보지도 못할 50억원이 승용차 안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또 싣고 달릴 수 있느냐 여부를 놓고 야단법석을 떠는 한 거물 정치인의 뇌물 수수 재판 기사를 대하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세상엔 이런 기사밖에 없는 것일까? ‘신문을 보면 세상이 곧 어떻게 될 것 같다’는 말로 언론을 비판한 노무현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허나, 그게 가장 눈을 잡아 끄는, 가슴에 와닿는 현실 이야기이니, 답답할 노릇이다.

물론 21일자 신문을 뒤적거리다보니 이런 기사도 눈에 띄었다. 러시아의 한 지방에서 열린 보드카 마시기 대회 이야기다. 무려 40도나 되는 보드카를 500cc잔에 채워 ‘원샷’ 하는 방식으로 2시간 동안 마셨다니, 우선 놀랄 일이다. 우승자는 500cc잔으로 넉잔을 마시고는 집까지 무사히 걸어갔으나 끝내 쓰러졌다고 한다.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면 변을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라크 전쟁에 종군한 영국 스카이 TV의 40대 분쟁 전문 기자가 핵잠수함 미사일 발사 사실을 조작 보도한 자책감에 못이겨 자살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헌신적인 가장이었던 그는 언론의 숙명인 특종경쟁에 밀려 정확한 보도라는 수칙을 지키지 못해 목숨을 버려야 했다.

영국 핵잠수함 스플렌디드호에 탑승해 “잠수함에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미사일이 발사됐으며, 그 생생한 장면을 화면에 담았다”고 보도한 게 화근이었다. 미사일 발사 장면은 국방부가 사전에 배포한 자료화면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망 소식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죽음이 또 하나 있었다. 60대 여성 투자자가 서울 모 증권사 객장에서 증시폭락에 쇼크를 받아 숨진 사건이다. 그녀는 주가가 이틀 연속 하락하자 주변사람들에게 ‘외국인 매도 때문에 개미들이 다 죽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6개월전 1,000만원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해 어느 정도 수익을 얻자 5,000여만원을 빌려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기사에 유독 가슴이 답답한 것은 서울발 기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드카 마시기 대회에서 우승을 위해 과욕을 부린 것도, 명예를 위해 세상을 속인 것도 아닌, 그냥 사회 분위기에 휩쓸린 ‘개미’란 죄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는 서민을 벼랑으로, 혹은 죽음으로 모는 악령의 늪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답답함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그렇다. 정치권은 한번에 수십억씩 꿀꺽하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당당하고, 강남에서는 아파트를 한번 샀다가 팔면 차익이 수억원씩 떨어진다고 한다.

특히 대선 때 수십억원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대통령과 그 보좌진에게 막말을 쏟아내는 소위 ‘사설 대통령’의 얼굴 뒤에는 갓난 아기가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자 할인매장에 들어가 우유를 훔치다 붙잡힌 20대 주부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또 어두컴컴한 주차장에서 은밀히 돈다발을 넘겨주는 대기업의 추한 손은 기업주의 과다한 손해배상 청구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조위원장의 피곤한 손이 겹쳐진다.

이런 극과 극의 풍경속에서는 60대 투자가가 상승세의 증시에 과감하게 배팅해 한몫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게 뻔하다. 또 부동산 투기 붐을 절망적으로 지켜보다 뒤늦게 자기집 마련에 나서 상투를 잡고 마는 서민들의 이야기는 내 몸하나 건사하기가 죽음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여기에 잇따라 터져 나오는 정치권과 얽히고 설킨 온갖 비리를 보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비리 정치인, 기업인이 끝없이 구속됐지만, 나아진 건 하나도 없다. 그 때마다 깨끗한 정치, 투명한 경영을 외쳤지만 주고받는 검은 돈의 액수만 커졌다.

아직도 주변에는 기업 비자금이나 권력 비리, 투자 기회 등에 대한 소문이 끊이질 않는다. ‘OOO가 모당에 건넨 수십억원에 대해 모두 불었다더라’ ‘XX는 이제 가고, XX가 뜬다더라’ 는 등 밑도 끝도 없이 괴담들이 나돌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어지럽다는 반증이다.

이런 세상에서 서민이 살틂껜?길은 하나밖에 없다. 어설픈 주변 분위기나 소문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참담함을 계속 곱씹을지라도 그게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는 불행을 막는 길이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3-11-2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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