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케네디 기자와 최병렬 편집국장


단식 닷새째인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유인태 정무수석을 만나 “노무현 대통령이 만날 용의가 있다”는 전언을 일단 거부했다. 최 대표는 “특검 거부권 철회가 우선이다. 대통령이 특검법 거부 및 재의 요구를 철회하지 않는 마당에 지금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재신임 국민투표 문제에 대해서도 이제 대통령이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보며 만약 최 대표가 단식에 앞서 1983년 광주사태 3주년을 맞아 23일간 단식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 2권을 읽었다면 과연 단식을 계속 했을까를 상정해 본다.

또한 11월 1일 번역되어 나온 존 F. 케네디의 6개월여의 짧은 기자 생활을 다룬 ‘권력에의 서곡’을 읽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최 대표는 YS가 단식을 했던 83년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다. 또 케네디가 암살된 63년 11월 22일에는 한국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YS 단식 때 조선일보는 ‘최근의 정세흐름’이란 암호같은 보도관제된 용어로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단식 엿새째가 되자(5월 23일) 한 석간이 “민한당이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당3역에게 ‘최근 문제’를 일임했다”는 기사를 4단으로 보도했다. 최 대표는 보도 통제의 압력도 있었지만 단식 같은 정치행동을 나름대로 분석, 보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YS는 회고록에서 단식일기를 썼음을 적고 있다. 단식 닷새째인 5월22일에는 “간밤에 잠을 잘 못 잤다. 자꾸만 눕고 싶었다. 거제의 아버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썼다. 단식 닷새째 최 대표가 문 실장을 맞는 다분히 ‘쇼적인’ 언행과는 사뭇 다른 처절한 단식 모습이다.

최 대표는 단식 사흘째인 11월 28일에는 찾아 온 기자들에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사설 쓰는 사람들 뭐하는거야. 대통령이 야당에 대해 이죽거리면서(노무현 대통령의 개와 고양이 발언) 수준 낮은 비아냥이나 늘어놓고 있는데 이게 대통령이 할 짓인가. 그런 부분에 대해 언론이 제대로 짚지 않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고 열을 냈다.

1983년 5월 20일, 단식 사흘째인 YS의 일기는 짧다. “가끔 현기증을 일으켰고, 배가 아팠다. 가족들은 음식 냄새가 나에게 전해질까 봐 마음을 졸이다가 우유나 빵으로 식사를 때웠다. 서예를 중단했다.” 그때 어느 신문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고, YS는 단식의 첫 고통을 느끼면서도 신문을 탓하지 않았다.

단식이란 정치적 행동을 싫어하고 이에 대한 보도를 자제했던 최 대표는 도대체 왜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단식”을 택했을까? 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아본다. 케네디의 ‘대통령이 된 기자’에서다. 결론은 최 대표의 기자 정신 쇠퇴(衰微) 가 쇼적인 정치 행동인 단식을 택하게 했다는 것이다. 6개월 여 동안 기자 노릇을 해본 케네디는 그 짧은 기자 생활을 바탕으로 대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 케네디 전기 및 평전 작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케네디의 기자 생활은 짧았다. 그는 1945년 5월 아버지와 관계가 깊은 미국의 신문왕 랜돌프 허스트의 계열사 신문인 ‘시카고 헤럴드 아메리칸’의 유엔 창립회의 취재기자가 됐다. 그의 첫번째 기사는 소련과의 냉전을 미국의 국방력 강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을 예측케 하는 것이었다. 1945년 3월 1일 해군 중위로 제대한 그는 5월 7일자 기사에서 기자 정신의 첫번째인 미래에 대한 낙관과 평화를 위한 신념을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탄생할 이 국제기구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출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정열과 이기심의 소산이다. 그러나 여기 한줄기 밝은 빛이 있다. 각국의 대표들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인류가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인식이다”고 그는 16년 후의 ‘지구적 대통령’의 속마음을 썼다.

그의 친구며 국내정치담당 비서였던 전기 집필자 시어도어 소렌슨은 평했다. “언론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케네디는 포츠담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힘의 논리에 의한 권력정치(power politics)를 관찰했고, 영국의 선거를 취재했다. 이 모든 것이 케네디에게 공적인 문제와 책무에 대하여 날카로운 감각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타임지에 대통령에 대해 기사를 쓰는 휴 시디는 1957년부터 알게 된 케네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그는 기자요. 독서가다.” 케네디가 45년 7월 포츠담 회의를 취재한 뒤 쓴 일기를 본 시디는 평했다. “그가 그린 전후의 독일은 자신이 보고 느낀 혼란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완전한 기자 본연의 자세였다”며 현실과 사실을 캐내는 능력이 탁월해야 기자정신이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 대표의 ‘단식’은 쇼적이다. 기자정신에는 사실의 파악에 의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있어야 한다. “사설 쓰는 사람들 뭐 하느냐”는 힐난에는 기자정신이 없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12-03 11:03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