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8일째 단식


정부 수립 이후 한 정부와 함께 퇴임한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스스로를 ‘역사 기자’(history+Journalism)라고 부른다. 그가 최근에 쓴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에는 1762년 6월 68세의 영조가 28세의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못질까지 해 굶겨 죽인 것을 ‘8일 간의 강제 단식’이라 썼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은 “조선왕조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 왕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의 처벌이었다. 52년이라는 조선 왕조 최장수 재위 기록을 세운 영조가 재위 기간을 통틀어 영군(英君)으로 평가되지 못하는 이유를 준 사건이다”고 해석했다. 이 사건이 주는 또 다른 의미는 인간이 8일간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좁은 공간에 갇히면 죽는다는 ‘8일째 단식’이다.

8일간의 자발적 단식의 고통을 알아서 였는지 김영삼 전 대통령은 12월 3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찾아 말했다.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내일 국회를 하니까 이를 계기로 단식을 푸는 게 좋다.”

YS는 1983년 ‘민주쟁취을 위한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상도동 집에서 경찰에 강제로 실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AP, 교토 등 통신과 아사히 신문 등이 5월 18일부터 시작된 그의 단식을 알렸다. 그의 단식일기는 적고 있다.

“병원에 이송된 후 나는 강제로 혈액 검사를 받았다. 당국에서는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해 건강이 상당히 악화한 것에 당황했다. 체중을은 61kg으로 평상시 보다 9kg가량이 줄었다.” YS는 최 대표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는 단식에서 회복하는데 9개월이 걸렸고 준비 없이 바로 시작해 숙변이 생겨 큰 고생을 했다. 너무 아파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하루 전날 최 대표를 찾은 정균환 민주당 총무는 “나도 과거 8일간 단식을 했는데 후유증이 길어 혼났다”며 특검법 재의결 후에 단식을 끝낼 것을 바랐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최 대표의 단식에 조금은 짜증을 냈다. 김학원 원내총무를 보내 그의 심사를 전했다.

“국회가 결정한 이상 대통령이 받아야 한다. 쓸데없는 일을 해 개점휴업하게 했다. 대통령이 받았어야 옳지만 비토하니 재의결 하면 된다. 밥 안 먹는 것 그만하고 국회에 나와야한다.” YS의 ‘굶으면 죽어’라는 말이나 JP의 ‘밥 안 먹는 것’이란 약간의 비아냥도 최 대표의 쇼적인 이번 단식을 겨냥 한 것이다.

그래선지 한겨레 김소희 기자는 12월 5일에 10일간의 단식을 마치며 열린 한나라당의 ‘특검 쟁취, 정치개혁, 나라 살리기’ 대회를 보고 ‘두루뭉실 단식 중단’이라고 썼다. “이 대회에서는 최 대표가 애초 단식목표로 내세웠던 국정쇄신의 구체적 성과나 방안과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YS나 정 총무가 말한 후유증은 계속 될 것 같다. 최 대표는 회복 후에는 내년 총선에서 현역의원 50%, 영남의원은 적어도 35%을 탈락 시키겠다고 확언했다.(중앙일보 12월 6일자) 최 대표는 국회표결에 앞서 조선일보에 실린 연세대 인도 근대사 연구교수인 이옥순의 “간디는 왜 단식에 성공했나”라는 시론을 읽어야 했다.

이 교수는 단식을 처음으로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1918년 첫번째에서 1945년까지 스무 한번째까지의 단식을 분석했다.

“간디의 단식을 보면 자기를 희생하는 단식이 무력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지만 동시에 단식 투쟁의 성공은 결정적인 요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단식 투쟁으로 맞서는 대상이 단식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아끼는 상황에서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간디는 1924년 한 편지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단식하지 말라고 적었다. 또 어떤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상대로 단식하지 말라고도 했다. 단식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다.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인내와 연민으로 상대가 실수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비폭력 정신이다. 투쟁의 대상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문화권이라야 단식이 의의를 가진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8일째 단식 중인 최 대표에게 권했다.“죽음을 소꿉친구처럼 껴안을수 있는 단식은 용기의 전형이지만 적절할 때 단식을 그만 두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최 대표는 YS의 방문과 이교수의 시론을 읽고 단식을 중단해야 했다. ‘최틀러’라는 별명으로 당권을 잡은 최 대표는 그를 ‘최딩크’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어제와 오늘’ 8월 26일자) ‘최딩크’는 상생(相生)의 정치,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것의 상징이었다.

65세의 ‘최틀러’는 단식 후에 ‘최처칠’이 되었으면 한다. 1940년 5월 65세의 처칠은 독일에 대?유화론을 펼친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다. 처칠은 대독 평화조약의 부당성을 밝히며 그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인간에게 유일한 안내자는 양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명성을 지켜주는 방패는 성실하고 진지한 행동입니다. 이런 방패도 없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은 매우 경솔한 일입니다. 살다 보면 희망이 좌절되거나 계산이 틀려져서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이런 방패만 있으면 운명이 어떻게 작용하든 우리는 명예로운 길을 당당히 걸어 갈수 있습니다.”

최 대표는 최근 번역되어 나온 ‘히틀러와 처칠-리더십의 비밀’을 병상에서 읽어 보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12-09 15:02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