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달라져야 하는 노무현 청와대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에서 백악관 주인이 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 첫해부터 위기를 맞는다. 백악관 여행국의 비리 의혹과 화이트워터 부동산 투기 의혹 등 악재를 그치지 않았고, 간신히 숨을 돌릴 즈음인 93년 8월 중순에 클린턴은 대통령직을 건 승부수를 띄운다.

레이건-부시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공화당의 경제정책 ‘레이거노믹스’를 폐기하고 새 경제계획안을 의회에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새 경제계획안은 민주당내에서도 반대자가 없지 않았다.

218대216. 가까스로 하원을 통과한 새 경제계획안은 상원으로 넘어갔다. 백악관은 의원들의 성향을 찬성, 다소 찬성, 미결정, 다소 반대, 반대 등 다섯 부류로 나눠 설득작업을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통과를 확신할 수 없자 클린턴이 전화기를 들었다. 상대는 그와 가까운 사이이자 92년 대선 예선전에서 경쟁했던 상원의원 밥 케리였다.

당시 대변인이었던 조지 스테파노폴러스는 백악관 생활을 담은 회고록 ‘너무나 인간적인’ 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그가 50번째로 동의할 것인가? 51번째로 반대할 것인가? 클린턴(대통령)은 케리(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를 파멸시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보시오. 아마 그냥 짐이나 싸서 (아칸소주) 리톨록으로 돌아가야겠지. 대통령의 위신이 곤두박질치고 있소, 그게 원하는 바라면 어디 한번 해보시오.”

그리고 스테파노폴러스는 그 대목에 ‘의회와의 전쟁’이란 제목을 달았다.

클린턴은 케리의 아내 리즈 모이니헌에게 남편에 대한 설득을 부탁하기도 했다. 표결 직전 백악관으로 케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은 입술을 깨문 채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참모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장면은 미국의 정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나왔고, 앞으로도 등장할 것이다. 백악관이 정책 하나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쏟는 땀과 노력을 대변하는 모습들이다. 미국이 대통령제를 폐기하지 않는 한 이 같은 ‘의회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을 가장 잘 반영하는 대통령제의 약점이 바로 의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나설 때가 아닌가.

특히 여소야대의 의회에서 의원들을 설득하는 건 대통령의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이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회, 가장 강력한 야당을 만나 정부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미국의 정치 환경이 우리와 다르지만, 법조인 출신인 그가 대통령제의 숙명인 의회의 견제를 모를 리가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취임후 전격적으로 3당통합을 시도한 것도, 역대 정권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면서까지 소위 ‘의원 빼오기’에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대의회 전략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정권 출범후 낡은 정치 타파를 외치며 검찰 독립, 당정 분리 등을 추진한 노 대통령이 이제 와서 ‘강력한 야당을 만나서 어렵다’며 책임을 국회ㆍ야당에게 떠넘기려는 듯한 태도는 앞뒤가 안맞는 일이다. 그건 처음부터 의회를 무시했던가, 아니면 대의회 관계를 태만히 했던가 둘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네탓’ 심리에서 나온 발상이다.

사실 야당은 노 대통령이 인식한대로 그렇게 강하지 않다. 겉으로만 여소야대일뿐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듯 야당은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최병렬 대표 체제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한나라당과 갓 출범한 조순형 대표 체제의 민주당이 결코 찰떡 궁합 파트너는 아니다. 서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야당을 손잡게 만든 것은 노 대통령의 미숙한 국정운영이다.

게다가 국가 현안에 대한 국민 여론이 곧바로 드러나 야권도 무턱대고 반대만 하기 힘든 상황이다. 정치 환경이 달라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야권을 상대로 포용력을 발휘한다면 여소야대 구도라 해도 얼마든지 야당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환경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오히려 노무현 청와대가 아닐까 싶다. 달라야 한다는 소리만 무성했을 뿐, 실제로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나 측근 비리 특검에 대한 거부권 행사 과정을 되돌아보면 ‘깜짝 쇼’ 연출에 오기 정치까지,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검법 의결 당시에는 의회를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야 의원에게 전화를 걸면 협박했다는 소문이 나돌 것을 미리 염려했는지 모르겠으나, 필요하다면 클린턴처럼 상대 의원의 아내에게까지 협조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설득은커녕 열린우리당 창당에 힘을 실어줘 여소야대 구도를 심화시켰다.

노 대통령은 측근비리 특검법안의 재의결로 더욱 어려운 처지로 몰홱? 이럴 때일수록 ‘내탓’에서 돌파구를 찾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기희생도 각오해야 한다. 개각보다는 ‘코드’를 희생하는 청와대 개편이 시급한 것 같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공개적으로 여론조사를 한번 해보라. 그게 참여정부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3-12-09 15:07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