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기분 나쁘면 미국에 가지 말라?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모스크바의 세레메체보 국제공항에 내리면 해외여행에 들뜬 기분이 싹 달아난다. 요즘 같은 날에는 공항청사로 새어드는 찬 바람에다 어둠침침한 불빛까지, 모든 게 여행객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고, 군복 차림의 출입국 관리를 대하는 순간 전기에 감전이나 된듯 저릿해진다. 내민 여권을 슬쩍 훑어본 뒤 쏘아보는 관리의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섬뜩하다. 마치 금지된 구역에 잠입하려다 붙잡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또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사무실로 데려가 샅샅이 뒤진다. 연간 1,000만명 이상이 이용하는 세레메체보 공항이 이러니, 다른 중소 도시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관원들에게 돈을 뜯기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그래서 러시아를 자주 드나드는 사람에게는 불문율 같은 게 있다. 공항 관리들의 동작이 아무리 굼떠도 불평하지 말 것. 질문에 토를 달지 말 것. 가급적 맨 뒤를 피하고 눈에 띄는 돌출 행동을 하지 말 것 등이다.

중동에서 날아온 항공기 손님들과 뒤섞이기라도 하면 그날은 속된 말로 ‘죽는다’고 봐야 한다. 입국 절차를 밟는데 두어시간은 각오해야 한다. 세레메체보 공항은 벌써 건립 당시의 수용능력을 크게 초과했는데 과거에는 서방간첩의 입국을, 지금도 테러범 입국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이뤄지는 지루한 검색을 견뎌야 한다. 2002년 9월 뉴욕과 모스크바에서 잇따라 폭파사건이 터지면서 출입국 관리들의 눈길은 더욱 삼엄해졌다. 러시아가 체첸 분리주의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과격 세력의 테러 준동에 시달리고 있으니 까다로운 입국자 검색을 무턱대고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시로 모스크바를 드나드는 외국인들은 까다로운 입출국 절차에 짜증부터 내기 마련이고, 유독 미국인들이 심하다. 미국은 90년대 후반 러시아측에 항의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만큼이나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이스라엘이다. 몇 년 전 파리에서 이스라엘 국적기 엘알(ELAL)로 갈아타는데, 공안요원들이 모든 승객을 철창 칸막이 안으로 몰아넣은 뒤 휴대품 검사를 했다. 테러범들의 항공기 납치를 막기 위한, 승객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 따랐으나 불쾌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텔아비브 공항에 입국할 때도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 어디에 묵을 거냐, 제3자로부터 전달받은 물품은 없느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자칫하면 입국을 거부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두번 다시 그런 대우를 받고 싶지 않지만 이스라엘을 찾는 관광객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그 과정을 통해 모두의 안전을 확보해주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이스라엘이 처한 국내외 정황을 보면 이해가 된다.

새해 들어 미국은 소위 ‘국경통제 강화조치’를 시행중이다. 비자 받기도 까다롭지만, 이제는 미국 공항에서 지문도 찍고 카메라를 향해 얼굴도 내밀어야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르면 자의에 반하는 강제적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은 범죄자에게만 행하는 것이다. 미국에 갈 때마다 우리는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꼴인데, 그 생체 정보가 미국의 각급 정보기관으로 간다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아마 다른 나라에서 그런 조치를 도입했다면 미국이 가장 먼저 ‘인권 침해’운운하며 반발했을 것이다. 모스크바 공항의 통상적인 입국 심사에 대해서도 항의했던 미국 아닌가?

허나 미국이 외국인의 입국 심사에 어떤 방식을 쓰든, 그건 시비의 대상이 안된다. 정당하게 입국하려는 외국인에 대한 ‘인권 보호’와 ‘테러 방지’란 명분 사이에서 어떤 길을 택하든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에 달렸다. 모스크바나 텔아비브의 입국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가면 되듯이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27개국의 국민은 미국의 공항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 국민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어떤 조치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예가 있다. 입국하려는 미국 관광객들에게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의무화한 브라질이다. 외교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상호주의에 입각한 조치다.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은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까다로운 입국 수속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불편을 참는 차원을 넘어선, 범죄인 취급이다. 50여년 전 미국에 총부리를 겨눈 일본과 독일도 그런 대우를 받지 않는데, 혈맹국이라는 우리가 ‘왜 그런…’ 생각에 자존심도 상한다. 우리에게도 미국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명분은 충분히 있다. 조만간 우리 젊은이들이 이라크로 파병가야 하고, 불법 체류 외국인 문제도 심각하고, 최근엔 알카에다 요원이 비밀리에 입국歐竪?했고….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편의주의에 그냥 당하기에는 억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미 자주외교를 외치는 참여정부는 모든 국민이 범죄인 취급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아니 할 것이라 믿는다.

입력시간 : 2004-01-13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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