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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자주와 동맹을 넘어


노무현 대통령은 17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새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윤영관 전 장관을 아쉬워 했다. “일 잘하고 물러나게 돼 안타깝다. 윤영관 전 장관과 노선 갈등은 전혀 없었다. 실용적인 노선을 펴왔던 것 아니냐. 한미관계의 중요성은 변함없고 그런 점에서 윤 전 장관과 생각이 일치했다. 윤 전 장관이 있는 동안 한국의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좀더 반영되는 외교를 했다고 평가한다”고 재임 11개월을 평했다.

윤 전 장관은 이 자리에 서글픈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15일 사임, 휴직 상태였던 서울대 외교학과(윤 장관은 외교학과 71년 입학생이다)에 복직 신청을 냈다. 학과장 신욱희 교수(80년 입학)는 “외교학 자체가 이론과 실천이 중시되는 학문인 만큼 1년 여 기간동안 외교를 책임지고 이끌었던 윤 전 장관의 복직은 외교학과로써 환영할 일”이라고 반겼다.

그를 가르쳤던 노태우 정부 때의 국무총리 노재봉 서울디지털대학 총장(53년 정치학과 입학)은 그의 사임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 강연에서 쓴소리를 했다. “미국과의 유대를 위해 중국과 유럽 여러 국가가 노력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북한까지도 미국에 체제보장을 요구하며 달러벌이에 나서는데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 경제에 엄청난 파동이 불어 닥칠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스승이며 같은 동료 교수였던 김용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56년 외교학과 첫 입학)는 신문에 기고를 삼가는 겸손을 깨고 조선일보에 시론을 썼다. ‘자주와 동맹은 보완관계’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19세기 들어서 1801년 신유사옥(천주교 탄압), 1884년 갑신사옥이 일어났던 역사적 악몽을 연상하는 듯 윤 전 장관의 사임에 대해 망국의 불안을 느꼈다.

김 교수는 1871년 고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자주동맹’이란 말이 생겼으며 ‘자주’나 ‘동맹’은 ‘반미’와 ‘친미’ ‘진보’와 ‘보수(수구)’라는 대칭어가 아니라고 논구했다.

“고종의 기본구상은 ‘동맹을 통한 자주’였다. ‘동맹’은 공자의 ‘춘추’에 나오는 말이고, ‘자주’도 전통적인 시대질서에서 즐겨 사용해 온 오래된 말이다. 서로 대립되는 용어가 결코 아니었다. 고종의 동맹론은 외국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조약들을 통해 나라의 자주를 보존한다는 현대적 구상이었다. 동맹을 통한 자주외교는 결국 실패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국제 정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출세에만 급급했던 일부 위정척사파들의 거센 저항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9ㆍ11 사태 후 미국의 일부 식자들이 ‘미국은 제국’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는 ‘새로운 미국’에 대해 “언어의 유희에 의한 대립을 조장할 시간은 없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10월, 외교학과가 설립된 후 이 곳을 거쳐간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관계연구회’는 김 교수의 정년퇴임에 맞춰 ‘국제정치와 한국’이란 4권짜리 총서를 냈다. 63인의 외교학과 졸업자 전문학자가 기고한 이 총서를 기획한 사람은 하영선 외교학과 교수(67년 입학)였다. 그는 윤 전 장관의 사임을 보며 중앙일보에 ‘외교부를 두 번 죽이지 말라’는 시론을 썼다. 그는 국제정치학 이론의 논리를 넘어 웅변했다.

“외교통상부는 21세기 한반도의 국익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장관 경질의 후속 조치로 외교통상부를 19세기적 발상인 ‘의존’과 ‘자주’의 경직화한 이분법의 무딘 칼로 무리하게 수술하려 한다면 이는 외교통상부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자주와 동맹의 복합화에 성공하려면 외교통상부를 두 번 죽여서는 안 된다. 한 나라의 외교관과 군인이 주눅들기 시작하면 나라는 망한다. 밖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관리해야 할 외교통상부는 안의 눈치보기에 정신 없고, 국익을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국방부가 박세리 수준의 승부 정신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 국민의 21세기적 자강노력은 사상 누각이다.” 그는 국가 안전보장회의 (NSC)가 새로운 인사로 개편되고 “대통령이 솔선수범 해 자주와 의존 타령을 넘어서 함께 주인이 되는 공주(共主)동맹의 21세기 비전을 제시하고 외교통상부와 NSC를 이끌어 가면 된다”고 권고했다.

노 대통령은 외교보좌관이었던 반기문 새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며 부탁했다. “지난 10개월간 서로 배운 기간이었으며 저도 외교에 대해 반 장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외교안보 분야에 대해 자문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라”고 주문했다.

새 네트워크 구성은 어렵지 않다. 반 장관은 앞서 말한 노 전총리, 김 교수에 이은 외교학과 63년 입학생이었다. 윤 전 장관이나 하 교수보다 선배다. 자문기관을 구성하기 전 국제관계연구회가 엮은 ‘국제정치와 한국’ 총서 중 ▦ 하 교수의 ‘문명의 국제정치학’(1권 ‘근대국제질서와 한반도’에 수록) ▦ 윤영관 전 장관의 ‘세계화와 탈냉전의 국제질서’(3권 ‘세계화와 한국’에 수록) ▦ 신욱희 교수의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역사적 고찰-식민주의, 냉전, 싸움, 탈냉전’(2권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한국’에 수록)을 읽기를 바란다.

특히 미국통으로 지미(知美)파로 알려진 반 장관은 1990년도에 외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부산에 있는 부산 경성대학 정치외교학과 권립 교수가 쓴 ‘양날의 자유-미국 민주주의 서론’을 읽고 그가 느낀 숭미, 친미, 반미를 넘은 비미(批美)를 실감하길 바란다.

* 필자는 1959년 두 번째로 외교학과를 개설할 때 입학했으며, 기자 생활 중 외무부 근처에도 못간 사회부 기자 출신임을 부기한다.

입력시간 : 2004-01-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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