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천당에 간 고관들의 사회


러시아 바스냐(우화)에 이런 게 있다. 한 고관이 화려한 침대에서 죽었지만 지옥으로 떨어졌다. 지옥의 재판관 아이아코스가 고관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페르시아의 지방총독입니다.”- “뭘 잘못해서 여기로 왔느냐?”- “잘못한 게 없습니다. 일을 모두 비서관에게 맡기고 저는 먹고 마시고 잠이나 잤습니다. 비서관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이나 하구요.”- “그래? 그렇다면 잘못 왔구나. 여봐라, 이 자를 천국으로 보내주어라.”

곁에서 지켜보던 상술(商術)의 신 메르크리우스가 물었다. “아니, 그 자를 왜 천국으로….”- “생각해 보아라. 저런 자가 직접 권력을 쥐고 일을 처리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끔찍했을 거다. 그나마 놀고 먹었으니 잘 한 일 아닌가?”

세상을 거꾸로 읽는 재미로 가득한 크뤼로프 우화(‘러시아 파라독스 세상 읽기’, 방인원 엮음, 백성)에 나오는 천국에 간 고관 이야기다. 이숍 우화 못지않게 아둔한 인간과 불공평한 세상을 통렬하게 비웃고, 비꼰 크뤼로프 우화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솔체니친도 늘 왼손이 닿는 곳에 두고 읽었다는 책이다. 어렸을 때 한번, 어른이 된 뒤에 또 한번 읽어 험한 세상을 헤쳐가는 지혜로운 역설을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고 한다. 천국으로 간 고관이란 이 우화도 나이 듦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라질 터이다. 놀고 먹은 고관을 질타하기는 커녕, 해악이 적었다며 천국으로 보낸다는 역설이 통렬하다.

최근 참여정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보면서 이 우화가 생각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첫해 무려 4억4,890만원의 재산이 늘어났다고 신고했다. 이 가운데 2억6,700만원은 서울 명륜동 자택 매각 대금인데, 지난해 취임 후 재산등록 과정에서 비서관의 실수로 신고에 누락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비서관이 내민 서류에 서명이나 한 고관은 잘못이 없다’며 비서관의 실수로 눙치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취임 후 문제를 삼은 언론을 향해 “각종 채무 변제에 써 오히려 대선 당시보다도 재산 총액이 5,711만원이나 줄어들었다”고 한 것은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대통령은 또 2억여원의 수입 중 세금을 뺀 1억8,500여만원의 80%인 1억5,550만원을 저축했다고 한다. 고위 공직자들도 ‘월급을 고스란히 저축하는’ 대통령의 코드에 맞춘 탓인지 재산등록을 마친 행정부의 1급 이상 공직자 581명의 75.2%인 437명의 재산이 늘었고, 1억 이상 는 사람도 93명이나 됐다. 특별히 재산이 크게 늘어날 이유가 없는 공직자들은 대부분 ‘월급 저축’을 사유로 기재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1년에 1억 가까이 저축했다면 생활비나 자녀 교육비, 문화생활비 등등에 월급을 거의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국민정서다.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녀 교육비 등으로 883만원이 감소했다고 신고했다. 경기침체와 실업난 등으로 ‘삼팔선’ ‘이태백’이라는 유행어가 나도는 시대에도, 김 장관 등을 제외한 다른 공직자들은 월급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어디 먼 나라 공직자였던 셈이다. 설사 공직자의 품위에 어긋나는 비리는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월급 노터치 정부’라는 비난도 나와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되돌아보면 ‘참여정부’의 공직자들은 역대 다른 정부보다 할 일이 훨씬 많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계층ㆍ세대간 갈등이 분출하면서 반목이 심했다. 그럴 때 월급을 쪼개 반목하는 당사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모범을 보일 수도 있었고, 그 흔했던 ‘아름다운 나눔’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정부에 대한 국민신뢰가 떨어질 때 주머니를 털어 관련자들을 만나고 민심을 듣기도 하고, 언론과 ‘술 한 잔’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월급을 많이 남긴 걸 보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비서관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이나 하면서 나오는 판공비 만큼 움직이지 않았나, 반성할 일이다.

먹고 노는 게 천당 가는 길이라는 사례는 또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복당할 즈음에 2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복당 사례비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박 의원은 공동 선대위원장 활동비로 받았다고 했다. 재작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불법자금까지 받아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돈에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는 이상 박 의원이 당으로부터 받은 돈이 불법자금인지 아닌지 당시로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 의원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선대위원장으로 뛰어다닌 사람을,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일(?) 놈’으로 만드는 분위기는 잘못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대통령 후보가 이기든 지든, 먹고 논 사람은 불법자금을 한 푼도 안 썼으니 도덕적이고 훌륭하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자들도 ‘천당 간다’는 얘기가 되는가.

입력시간 : 2004-03-0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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