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낙관적 출발, 그러나 방심은 금물


‘열도 정복’, ‘남벌(南伐)’. 메이저리그 행의 꿈을 잠시 접고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한 ‘국민타자’ 이승엽(28ㆍ지바 롯데)의 활약에 대한 기대감을 다소 거창하게, 보기에 따라서는 ‘반일 감정’ 섞인 뉘앙스로 나타내는 국내 언론들의 관용적 어법이다.

어떤 독자는 과거 역사의 구원(舊怨)에 얽매인 듯한 표현이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국내 언론의 표현을 점잖게 꼬집기도 했다. 물론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부디 이승엽 선수가 열도 정복 정도가 아니라, 나아가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면 하는 것이 대다수 야구팬과 국민들의 솔직한 바람 아닐까. 이웃 나라의 총리를 비롯한 우익 지도자들은 잊을 만하면 신사참배니 뭐니 들고 나와 주변국의 속을 뒤집어 놓곤 하는 행태에 비긴다면, 한국 야구를 한 수 아래로 보는 그들의 통념을 대한의 홈런왕이 ‘순수한 스포츠맨십’의 힘으로 뒤집어 놓는 것은 얼마나 순수한가.

실전에 나선 이승엽의 출발은 일단 나빠 보이지 않는다.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첫 시범 경기에서 홈런은 커녕 연방 헛스윙으로 물러날 때만 해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일으켰지만, 그는 특유의 적응력을 바탕으로 경기를 거듭할수록 서서히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시범 경기 6경기를 마친 7일 현재 성적은 타율 0.278, 4타점, 1홈런. 7일 주니치 전에서 3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며 주춤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어차피 시범경기는 자신과 상대의 장단점을 파악하며 경기력을 조율하는 데 궁극적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곧 개막될 정규 리그에서의 성적이다. 스프링 캠프나 시범 경기에서 아무리 잘 해본들 진검 승부에서 무릎을 꿇으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투수들은 알게 모르게 이승엽의 기를 꺾기 위해 혼신의 투구를 하는데, 시즌이 본격 개막되면 견제의 정도는 더욱 심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국내서 야구 천재로 통하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도 처음엔 신바람 나는 야구를 하다가 일본 투수들의 집요한 몸쪽 승부에 부상을 입은 후 그만 위축되고 말았음을 야구팬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승엽은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가 따뜻한 마음씨로 벌써부터 일본인들의 후한 점수를 받고 있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다. 허나 현지에서 진짜 원하는 호쾌한 타격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아시아 홈런왕의 명예와 한국 야구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국내서보다 더욱 독한 다짐이 요구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국민 타자의 승부사적 기질을 기대해 본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4-03-10 21:08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