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전쟁 영웅 존 케리와 대권의 꿈


1993년 8월 미국 의사당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상원에 제출한 새 경제 계획안이 찬성 49표, 반대 50표. 마지막 한 표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표가 찬성이면 고어 부통령의 캐스팅 보트로 경제안은 가결되고, 반대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백악관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통을 잡고 고함을 질렀다. “그래, 나를 파멸시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보시오. 백악관에서 짐을 싸서 리틀록(아칸소주 수도)으로 돌아가면 되지.” 상대는 베트남 전쟁의 영웅 밥 케리 상원의원이었다. 그가 클린턴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1971년 4월 미국 상원 외교위 청문회. “정부는 무슨 권리로 젊은이들을 정당하지 않은 전쟁터에 보내 죽음으로 내모느냐. 당장 중단하라” 는 한 해군 장교의 증언으로 술렁거렸다. 증언대에 선 장교는 베트남에서 갓 귀국한 존 케리 중위였다. 사선을 넘나들며 전우들의 생명을 구해내,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은 전쟁 영웅의 주장이기에 국민의 충격은 더욱 컸다.

다른 엘리트트들이 전장을 피할 때, 기꺼이 베트남으로 날아간 ‘케리’들(밥 케리, 존 케리)에게는 전쟁 영웅이란 수식어가 뒤따른다. 밥은 미국에 15명뿐인 해군의 명예훈장 수상자이고, 존은 반전운동가로 변신해 전우들과 베트남서 받은 훈장들을 의사당 계단에 집어 던졌지만, 훈장의 빛깔이 바래지는 않았다.

전후 세대(2차 대전 직후 출생)는 아니지만, 베트남전 세대(베트남전 참전 대상)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선전에 뛰어 든 두 사람이 경쟁 상대의 병역을 확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밥은 9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민주당 예비 선거에 나서, ‘돌풍’을 일으킨 클린턴을 ‘병풍(兵風)’으로 맞서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뜻을 접었다. 그러나 상원의원이 된 뒤에도 끝까지 전쟁터에서 형성된 애국심을 내세워, 사실상 병역을 기피한 클린턴을 괴롭혔다.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의 초반 돌풍을 잠재우고 민주당 대선후보 자격을 따낸 존은 오는 11월 부시 대통령과 맞붙을 본선에서 베트남전 세대에게 큰 약점인 ‘참전 기피’를 ‘병풍’으로 연결시킬 전략인데, 클린턴을 꺾지 못한 밥과 어떤 차별성을 보일지 관심이다. 섹스 스캔들과는 달리, 병역 문제는 지금껏 대선전에서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이번 대선은 9ㆍ11 테러와 이라크전 등으로 애국심이 강조되고 있어 섣부른 예측을 불허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전쟁 영웅이 부각되는, 흥미진진한 대선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 특히 병역 문제가 대선 쟁점으로 떠오를 지 지켜볼 일이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에게 진 고어 부통령을 “우리 세대의 대표”로 믿고 지지했던 존 케리가 제2의 고어가 되지 않으려면 ‘귀족의 물’을 더 빼고 ‘파이팅’을 높여야 한다. 그는 외교관 아버지, 출판 재벌인 포브스가 출신의 어머니를 둔 명문가 자제다. 고어나 부시에 못지 않는 귀족형이다. 그래서 카우보이형 부시를 잡으려면 베트남전 솔저로 돌아 가야 가능한 판국이다. “내 뱃속에서 타오르는 불을 보라”며 차별적 입지를 강조하는 만큼, 그에 따른 이미지 메이킹은 대선 승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부시보다 케리의 선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노선, 스타일 때문이다. 지금까지 투표 성향으로 보면, 케리는 상원에서 9번째로 강한 진보성향의 소유자다. 신자유주의나,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에는 비길 수 없지만 자유무역론자다. 그러나 최근 일자리를 잃고 시름에 잠긴 유권자를 잡기 위해, 또 민주당내 ‘반 부시’ 정서를 업기 위해 최근 노선을 바꿨다. 아이오와주나 뉴햄프셔주에서 “케리가 돌아 왔습니다. 새롭게 바뀐 뉴 케리입니다”고 외친 ‘뉴 케리’는 부시 행정부의 제국주의적 세계화와는 다른, 현실을 인정하는 진보 노선이다. 이런 자세가 바탕이 돼 2개월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민주당 후보 자격을 거머쥘 수 있었다. 미국의 억압적 세계화가 케리의 손에 의해 합리적 세계화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케리는 ‘클린턴’프리즘을 통해 북한 문제를 본다. 최근 언론 회견에서 클린턴 시절의 ‘페리 프로세스’(대북 포용정책)에 미련을 보였다.‘악의 축'과 6자회담이 부시의 대북 정책을 상징한다면 케리의 키워드는 포용과 북ㆍ미 대화가 될 것이다. 더욱 다행한 것은 그가 베트남전 참전을 계기로 전쟁보다 평화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98년엔 상원 동아태소위 위원장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분단국의 아픔을 들은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애국심은 숙고의 대상이다. 미국은 안보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 후세인 제거를 위한 이라크전에 찬성표를 던졌던, 그의 타고 난 애국심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개인의 성향이나 노선과 국가 이익은 다르다. 그도 대통령이 되면 무엇보다 국가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케리 개인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대미 외교 전반을 손질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4-03-11 22:40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