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우리 모두의 상처


‘원조교제’는 비뚤어진 가부장적 성문화의 상징이다. 연약한 여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강한 남자 콤플렉스가 반영돼 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그 거대한(?) 힘을 자랑할 기회가 턱없이 줄어 들어서 일까. 말세(末世)의 징후가 되어 사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다.

단어 그 자체로만 본다면야 원조교제라는 말은 본디 “도와주면서 교제한다”는 눈물겨운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성년자들의 몸을 사는 자신들의 매매춘에 대한 수치감 및 죄책감을 희석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져 있는 ‘청소년 성매매’의 우회적 표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마리아’는 그런 통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 하다. 여고생 재영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한다. 순수한 자신의 몸으로 불쌍한 남자들을 ‘구원’한다는 생각때문이다. 반면 여고생 여진은 친구 재영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자, 성인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혐오하던 태도를 바꿔 몸소 ‘속죄’에 나선다. 감상 후, ‘청소년 성매매를 이렇게도 미화시킬 수 있구나’ 하는 경탄이 나올 지경이다.

원조교제를 ‘구원’과 ‘속죄’로 표현하는 미학적 해석을 제멋대로 받아들인 때문일까? 그 행렬에 점점 더 어린 학생들이 줄줄이 참여하고 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17, 18살짜리 애가 성매매를 했다고 하면 ‘이렇게 어린 애가…!’ 했는데, 요즘에는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이렇게 큰 애도 왔네!’라고 할 정도예요. 14, 15살짜리가 청소년 성매매의 주류라고 할 만큼 연령이 낮아진 탓이죠.” 갈수록 청소년 성매매 피해자의 나이가 어려지는 세태를 두고, 청소년쉼터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혹자는 그 같은 현상을 두고, 육체를 상품으로서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도 한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지 않았느냐며 쏘아 붙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청소년이 황금 만능주의에 물들었다고 해서, 백번 양보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그들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의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겉으로는 돈과 육체의 물물교환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 이르러서, 그것은 아직 까마득히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범죄다. 일본인들이 만들어 낸 이 요상한 명칭을 언제까지 답습할 것인가?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3-17 20:43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