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애향심, 좀 그만 발휘합시다


언론사 상식 시험에 ‘Favorite Son’이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응시자들의 답변은 차라리 아이디어 전시장이었다. ‘남아 선호 사상의 영어식 표현’이라는 답변은 애교에 속하고, ‘유명 가수 OOO의 팝송 제목?’혹은 ‘여러 아들 중에서 사랑을 받는 장남’이라는 기발한 발상이 답으로 나왔다. 눈치 빠른 응시생 이었다면,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썼을 지도 모를 일이다. 미 백악관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거대한 권력 투쟁을 스릴러 형식으로 그렸던 1988년도 미국의 TV 미니 시리즈 제목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말이니.

정답은 미국 대선에서 나타나는 유권자들의 고향 후보 찍어주기 성향, 혹은 그에 따라 선택된 후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넓은 의미의 지역주의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특정 주에서 승리한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독특한 지역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2000년 대선에서 전국 득표율에서 앞선 고어 부통령이 눈물을 머금고 부시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준 이유이기도 하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식 지역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는 ‘3김’식 보스 정치와 함께 망국적 지역 패권주의로 통했다. “우리가 남이가?”로 상징되는 영남, 호남, 충청이란 연고지 중심의 투표 행태는 줄곧 선거 판세를 좌지우지했다. 영남 출신 노무현 후보가 재작년 대선에서 호남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키면서 망국적 지역주의는 사라지는 듯했으나 4ㆍ15 총선에서 지역의 뿌리는 여전히 굳건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선자와 정당 득표율로 보면 영남과 강원은 한나라당 세력권, 호남과 충청 경기도는 열린우리당 세력권으로 편입돼 동서로 갈라진 표심을 또 다시 확인해야 했다.

특히 한나라당에게 표를 몰아준 대구경북(TK) 지역은 신 지역주의를 부활시킨 원흉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데, 정작 당사자들은 억울해 한다. 친노 대 반노, 탄핵 찬성 대 반대, 열린우리당 대 한나라당의 싸움 양상을 띤 이번 총선의 특성상 한쪽으로의 표쏠림은 어쩌면 당연하다. 열린우리당도 광주와 전북에서 싹쓸이 했잖느냐는 반론도 그래서 가능하다.

4ㆍ15 총선 결과를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기존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 미국식 Favorite Son 표심을 엿볼 수 있다. 정동영 의장의 출신지인 전북에서 열린우리당의 득표율은 지역구 64.58%, 정당 67.3%로, 표 집중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정 의장의 앞날에 대한 기대를 담은 Favorite Son 표심이다. 한나라당이 대구에서 62% 안팎의 지역구ㆍ 정당 득표율을 올린 것도 박근혜 대표에 대한 Favorite Son 심리의 결과이고, 부산경남(PK)지역에서 열린우리당이 30% 이상 득표한 것도 따지고 보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Favorite Son 표심이 아닐까 싶다.

열린우리당은 창당 명분으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전국 정당을 내걸었으나 누가 봐도 숨겨진 뜻은 분명하다. 민주당 간판으로는 도저히 영남에서 1석도 건질 수 없으니 간판을 바꾸고, 노 대통령에 대한 Favorite Son 심리에 기댄 것이다. 노 대통령이 부산 출신 측근들에게 ‘노심’을 얹어 부산에 ‘올인’시킨 것도 고향에 대한 기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구상이었다. 다행히 탄핵 반대 바람이 겹치면서 총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국 정당의 꿈은 이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Favorite Son 표심도 지역의 우월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TK와 PK를 움직인 박근혜 대표의 거여 견제론은 기호 2번 호남의 압도적 지지로 거대한 여권이 형성되고 있는데, 영남이 그 밑으로 들어가면 되겠느냐는 자극적 물음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영남권의 독선은 한나라당의 TK 및 PK 석권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분명히 TK 유권자들에게 있다. 30년 가까운 권력 소유에서 배태된 오만한 우월주의로는 97년 대선,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패배 구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역주의든, ‘Favorite Son’이든 호남과 충청이 손을 잡는 DJP(김대중ㆍ김종필) 구도 하에서, 또 꼴통(?) 보수와 중도 보수간의 이미지 싸움 아래서 TK는 표대결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DJ가 진보 개혁세력을 장악하고, 호남에서 90%이상 지지를 얻었음에도 정권을 창출하지 못하다가 충청과 손을 잡음으로써 정권교체의 꿈을 이룬 것은 TK에게 무척 교훈적이다.

권력에 미련이 있다면 TK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젊은 표심을 얻고, 호남과 충청 민심을 잡아야 한다. DJP 결합을 깨지 않으면 권력 창출은 불가능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4-04-22 17:08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