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비단섬에서 본 용천


북한 용천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4월 22일 새벽, 참사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10년 전인 1995년 4월, 기자는 중국의 비단섬(뚱항ㆍ東港)에서 압록강 너머로 용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방 50주년을 맞아 중국 답사에 나서, 랴오닝성(遼寧省)의 성도인 선양(審陽)을 떠나 2개월여만에 마지막 기착지인 단둥(丹東)시에 도착했을 때였다. 평북 신의주와 마주한 단둥은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국경지대의 서안평(西安平)을 점령(313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축출했을 때 서안평의 현재 지명이다. 단둥은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신의주 가까운 곳에 교통 요지인 용천이 있다.

기자는 단둥에서 압록강 철교를 돌아본 뒤 철교 앞 기념품 가게에서 북한 우표를 구입하다 부모의 고향이 용천이라는 조선족 최모씨(51)를 만났다. 일제말 가난을 피해 피해 중국으로 넘어간 최씨 부모는 이미 작고했고, 용천에는 어머니쪽 친척이 몇 분 있다고 했다. 최씨는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단둥에서 20km 떨어진 비단섬에 가 용천을 바라보곤 했는데 부모가 작고한 뒤에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가끔씩 찾는다고 했다. 그는 중국 공장에서 월 3만5천원의 박봉으로 살아가면서도 생활이 더 어려운 용천의 친척들에게 1년에 한두번씩 물품을 건네는 등 ‘뿌리’를 잊지 않았다.

기자는 최씨와 비단섬에 도착했을 때 압록강 너머의 용천을 바라보며 고려의 서희가 거란 장군 소손녕과 담판지어 영토를 확보한 ‘강동 6주’를 떠올렸다. 6주의 하나인 용주가 지금의 통천이다. 그러나 최씨는 동행 내내 조용했고, 뿌리땅의 동족을 만난 ??문인지 용천을 바라보는 눈가가 젖어 있는듯했다.

무심코 잊고 지내던 용천은 느닷없이 1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대형참사로 가슴에 와 박혔다. 동시에 최씨의 주름진 얼굴과 압록강, 그 너머의 용천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참사 1주일째,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의 지원이 인도애라면 한국의 그것은 뿌리가 선명한 동족애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이념이나 여야, 참사를 둘러싼 여러설들은 공허하다. 단둥의 최씨가 박봉으로 가녀린 뿌리를 어루만져주듯 순수한 동참과 열정이 필요한 때다.

용천 참사에 최씨는 타는 가슴으로 단둥 철교를 서성이거나 비단섬으로 달려가 용천에 있는 핏줄의 안부를 염려하고 있을 지 모른다. 동족의 상처가 신속히 치유되기를, 최씨의 친척들도 안녕하기를 마음으로 빌어본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4-27 15:55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