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생명경시와 가치붕괴


자기 파멸을 통한 자기 승화인가. 자살은 이제 우리 사회가 피할 수 없는 심각한 병리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2002년 현재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 당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19.13명. 지난해에도 1만3,005명(경찰청 집계)이 스스로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최근 유명 인사들의 잇따른 자살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40분마다 한 명씩 자살하는 ‘잔인한’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지도층 인사들의 자살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사회적 파장이 달라 정치적인 해석을 가하거나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선 결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지도층의 자살은 그들이 일반인의 사회적 역할 모델이 된다는 점에서 “권력과 명예, 지위를 가진 사람도 목숨을 끊는데 나 같은 사람은 죽어도 되지 않느냐”는 극단적인 충동을 불러 일으켜 사회에 전염병처럼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의장의 자살 이후 일반인들의 자살붐이 일었다. 누군가 자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비춰지는 사회 분위기가 자살을 문제 해결 방법 중 하나인 것인 양 간주하게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캥은 자살을 4가지 형태로 분류했다. 사회의 통합이 지나치기 때문에 개인의 관심이나 생명이 과소평가되는 사회에서 절망과 허무함의 충동은 극단적으로 ‘ 애타(愛他)적 자살’을 불러 일으킨다. 또 사회규범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기능을 잃을 때 개인 간의 결합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갈등은 ‘ 이기적 자살’을 부추긴다. 반면 사회의 변동기에 가치의식의 붕괴로 인해 개인의 방향감각이 상실되거나 안정감이 사라질 때 발생하는 것이 ‘ 아노미적 자살’이다. 여기에, 죄인의 경우 등 과도한 억압 상태에서 아노미적 현상이 깊어지면서 ‘ 숙명적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 비리에 연루된 유명 인사들의 잇따른 자살행렬, 자살 사이트를 통한 집단 자살,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함께 죽음으로 몰아가는 동반 자살 등 우리 사회의 자살은 네 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얽힌 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유명 인사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원인에 대해 심영희 한양대 교수는 “자신의 명예ㆍ경력ㆍ부 등이 일 순간에 무너지는 정신적 혼돈상황에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유수현 숭실대 교수도 “조직의 잘못을 자신의 희생으로 덮으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동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투신 자살한 것은 억울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이상현 동국대 교수는 “일반인의 경우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공격성이 외부로 발휘돼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강하나 지도층의 경우 자신이 공격의 대상이 돼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상훈 생명의 전화 자살예방센터 원장은 “지도층의 자살은 사회적 영향력이 커 실제로 모 유명인사의 자살 이후 자살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담전화가 잇따랐다”고 설명했다. 자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범국민생명존중운동본부를 발족한 이홍식 원장은 “이런 때일수록 주변에 관심을 갖고 사회 전반적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40분마다 한명씩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현실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생명 존중 운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 2004-05-04 15:44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