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즐거운 개혁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정지 63일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약간 으스대는 듯한 특유의 걸음걸이가 ‘돌아온 장고’를 연상케도 한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기각 결정은 민의를 적극 수용한 것으로, 궁극적으로 잘 된 것이다.

누구 봐도 민의는 분명했다. 탄핵 전후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0% 이상이 노 대통령이 중립 의무를 저버리고 선거에 개입한 위법 사실에 분명히 사과해야 한다고 했으나, 대통령 탄핵에는 반대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유 중 상당 부분에서 위법성이 인정되나 그 위법성이 대통령을 파면시켜야 할 만큼 위중하진 않다는 헌재의 결정 요지와 다를 바 없다.

맡겨두기 보다는 개입하고, 지켜보기 보다는 말하기 좋아했던 노 대통령이 무려 63일간 손발이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달만에 나선 산행에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읊조린 것도, ‘칼의 노래’(김훈 저)란 책을 가까이 한 심정도 이해가 간다.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몰라주는 주변에 대한 안타까움이, 끝없이 고독을 곱씹어야 하는 지도자의 고뇌가 절절했을 것이다. 그럴 때 느끼는 답답함은 모두에게 익숙한 현실을 타파하고픈 ‘칼의 노래’로 투영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익숙한 것들과 결별은 늘 고통과 불편을 몰고 오게 마련이다.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국가 지도자의 현실 개혁도, 적어도 당분간은 국민 모두에게 고통과 불편을 안겨준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개혁 저항세력이 준동하는 법이니, 개혁의 성공여부는 바로 고통과 불편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있다.

최근에 우연히 접한 신간 ‘즐거운 불편’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에 따른 불편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 호쿠오카 총국에 근무하는 후쿠오카 켄세이 기자가 쓴 이 책은 중독처럼 몸에 배인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 자본주의적 대량 소비 등과 결별할 때의 불편을 즐거움과 행복을 얻는 과정으로 바꾸기까지의 체험기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청량음료를 끊고, 외식 대신 도시락을 싸고, 직접 무공해 쌀과 채소, 과일을 재배하고….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바로 ‘웰빙’을 실천하는 것인데, 그것을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가 1년여만에 내린, 불편함을 극복하는 비결은 바로 즐거움이다. 익숙한 것을 끊는 금단현상을 겪은 뒤, 불편과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체득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즐거움이 없으면 어느 순간부터 하루도 계속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인습이나 관습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의사로…(중략)…어느 정도 기계의 힘을 빌려가면서 즐겁게 농사를 짓게 되면 정원 가꾸기 다음으로 농사가 유행할 지도 모른다”고 내다 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복귀 화두로 내건 ‘개혁’이라는 단어도 궁극적으로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것과의 결별이다. 불법 정치자금, 기업 비자금, 지역주의 및 특정 인맥에 의한 특권 특혜, 행정편의주의, 노조의 귀족주의 …. 이것들을 타파했을 때, 이른바 기득 계층이 느낄 고통과 불편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개혁은 실패한다. 소련의 고르바초프식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인민에게 개혁의 과실이나 즐거움은 안겨주지 못하고 개혁 피로의 정도만 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노 대통령이 떠나 있는 사이 정국은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었다. 47석의 미니정당으로 4ㆍ15 총선을 치른 열린우리당은 무려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됐고, 탄핵을 주도했던 민주당은 존재조차 희미해졌다. 남은 임기 3년 몇 개월도 그가 부르짖는 개혁을 추진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우리 주변에는 개혁에 따른 고통과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 등 야 3당은 총선에서 혼쭐났거나 초토화됐지만 정당 득표율을 모으면 열린우리당의 38.3% 보다 높았다(45.7%). 헌재 결정 덕에 돌아 온 노 대통령이 아직도 탄핵 자체에 승복할 수 없다는 등 반대 세력에 억하 심정을 갖고 있다면 버려야 한다. 그 보다는 국민에게 개혁의 즐거움을 홍보하고 동참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시급하다.

노 대통령도 인간이다. 간단한 것이라도 익숙한 것과 결별하면서 그 불편을 스스로 느껴, 국민의 개혁 고통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다. 적당한 방법이 없다면 ‘즐거운 불편’의 책장을 넘기며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즐겁게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노무현식 개혁도 절반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다.

훗날 역사는 ‘노무현 대통령은 총선 올인?헌재의 탄핵기각 결정으로 정치란 도박판에서 한 몫 챙긴 최후의 승자가 됐다’고 기록할 지도 모른다. 노무현식 개혁이 그야말로 ‘즐거운 개혁’이어야 하는 이유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4-05-20 16:20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