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고건 총리와 파월 장관


대통령 권한 대행을 고난대행(苦難代行)이라 표현하며 5월 12일 총리직 사의를 표명한 고건 국무총리. 20일 이른바 새 국회 개원 이전 내각 개편 ‘ 편법 제청’에 대해 이례적으로 입장을 짧게 밝혔다. “ 아직 청와대에서 공식통보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장관 임명 제청권 행사여부를 결정한 바 없다”는 것이었다. 고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큰 물을 건넜으니 이제는 말을 바꾸는 것이 순리”라는 말로 사의를 표명했다. 또한 내각의 개편은 헌법 87조 총리 제청권을 새 총리에게 주는 것이 헌법정신에 맞다는 소신을 펴기도 했다.

총리실의 20일 발표는 고 총리가 제청권을 행사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언론은 드물다. 오히려 ‘ 결정한 바 없다’는 뜻은 국회개원으로 새 총리 인준이 늦어질 경우, 정국 타개를 위해 또 한번의 ‘ 고난’의 소신 꺾기에 나설 것으로 적지 않게 보고 있다.

그런 분석의 틀을 주는 것은 대통령제 하에서 총리나 수석장관(미국의 국무부 장관)의 역할은 정치인, 정치꾼(politician. 정당과 선거에 의해 선출된)이기 보다 정치가, 행정(stateman. 국내 정치가나 외교에 관한 정치가)의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총리나 장관직은 대통령에의 야망 대신 안보, 졍제 분야 등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그런 정치, 경세가(經世家)가 맡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정찬용 인사수석이 19일 개각과 일부 기관장 교체를 앞두고 밝힌 인사 소신과는 전연 다른 인물이 스테이츠맨이다. 정 수석은 “20년 전 (고시)시험 좀 잘 봤다고 60세 먹을 때가지 우등생일 수는 없다. 계속 공부해서 혁신과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장관이나 기관장인 스테이츠맨을 폴리티션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정치가가 총리요 장관이다.

고 총리가 제청권을 다시 행사 할 것으로 보는 또 다른 예는 미국 국무장과 콜린 파월에게서 볼 수 있는 소신을 접는 스테이츠트맨쉽(정치적 수완) 때문이다. 그는 14일 워싱턴에서 열린 선진 8개국 외상 회의를 마치고 공동회견에서 “이라크 임시정부 요청에 따라 자국군대를 철 수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16일에 폭스 뉴스에 나와 “이라크 치안병력이 이라크 안보상태를 당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고 14일 말을 바꿨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15일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백기항복으로 비칠 수 있는 조기철수 가능성은 거론 않으면서 “주권이양 후에도 미군의 핵심 임무는 계속 될 것이다”고 파월의 G8 발언을 부연 설명한 것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파월은 16일 폭스 발언에서 14일의 철수 발언은 “가정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일 뿐이다. 미군이 요청이 있으면 철군을 한다는 것은 이론상 미국의 입장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부시의 입장을 재천명했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정치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 총리와 파월 국무장관의 나이나 스테이츠맨의 경력은 매우 비슷하다.

고 총리는 1938년 1월 2일생으로 전북 옥구군 월하리를 본적으로 정치이력의 첫줄을 서울대 총학생 회장으로 시작했다. 청와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79년 정부 2수석 비서관 때 교통, 농수산, 내무의 세 장관을 거쳐 두 차례 국무총리(문민정부 마지막과 참여정부 첫 번째), 제 2기 서울 민선 시장을 지냈다.

파월은 1937년 4월 5일생. 자마이카 이민2세 뉴욕 킨구(區) 출신. 미국 시립대 ROTC 연대장. 백악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71년 닉슨 때 육군의 백안관 특별연구원이 된 것. 77년 카터 때 브루진스키 안보 보좌관의 보좌관. 86년 레이건 때 국방 장관 특별보좌관, 86년 레이건 안보 보좌관, 1차 걸프전 대 흑인 최초의 대장으로 합동참모 회의 의장으로 참전, 94년 클린턴 때 퇴역했다. 두 사람의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들의 회고록과 인터뷰에 의하면 고난과 고심의 자기 절제였고 국민을 위한 정부에 바치는 충성의 길이었다. 나라를 지배하는 대통령에 충성하는 긴 35~40년의 역사였다.

파월은 베스트 셀러가 된 봅 우드워드의 ‘공격 계획’을 위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2002년 8월 부시가 이라크의 공격을 미국 단독으로라도 감행할 목표, 목적을 정했을 때다. 부시는 단독으로 만난 파월은 “당신은 재선을 하려고 하는가. 미국이 단독으로 이라크를 침공하면 언제 빠져 나올지 모른다. 유엔?통해 동맹국과 협동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부시는 “내 목표는 인민을 압박하는 사담의 제거다. 중동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심는 것이 목적이다. 대통령은 전략가다. 당신은 전술가다”며 사담 체제를 선제공격으로 제거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파월은 그의 소신과는 전혀 다른 대통령의 전략에 소신을 꺾었다. “나의 35여년의 군인생활과 그 후의 장관 역할은 결국 보스(상급자, 대통령)에게 방법을 개진 하는 것에 그친다. 많은 것을 말하려 하지만, 이미 보스가 사전에 결정한 것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내가 너무 연약해서일까”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파월의 국무장관직을 버려라”는 자유언론의 요구에 “부시는 나라의 안보를 위해 올바르게 가고 있다”며 국무장관직을 계속 하고 있다. 1997년 클린턴 재선 때 공화당 대통령 유력 후보였던 그는 미국의 안보에 흑인 대통령은 아직 이르다며 그 꿈을 버렸다.

파월의 고심의 장관직은, 고 총리의 ‘ 고난의 대행’처럼 위대한 스테이츠맨이 되는 길이란 자기 절제임을 일깨워 준다. 또한 대선의 꿈을 가진 정치인은 내각의 정치가를 택하지 않는 게 좋음을 가르쳐 준다.

입력시간 : 2004-05-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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