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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한 고비 넘겼다는 건가?


정치부 기자로, 또 대통령 정무수석으로 권력의 생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주돈식 세종대 석좌교수는 대통령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오만과 독선을 든다. 역대 대통령 8명을 비교 평가한 책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사람과 책 刊)를 최근 펴낸 그는 대통령들이 경제발전, 자주국방, 민주화 등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는 순간, 오만함에 빠지면서 불행한 결말을 초래했다고 안타까워한다. 인간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 ‘내가 옳다’는 착각인데, 권력을 쥔 측이 ‘자기 정당화’에 흠뻑 젖으면 이성을 잃고 밀어 붙이기 무리수를 두기 십상이다. 사실 그게 권력의 단맛인지도 모른다.

47석의 미니 정당으로 총선을 치른 열린우리당이 탄핵역풍에 힘입어 과반수를 넘는 제1당이 되자 ‘나는 늘 옳다’는 집권여당식의 착각에 서서히 빠져드는 느낌이다. 총선 승리와 함께 열린우리당이 국정 2기를 이끌 총리 및 장관 후보를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낙선자 배려 운운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각하 결정이 내려지자 청와대는 김혁규 총리안을 전제로 내맘대로 개각을 밀어붙일 태세다.

문제는 합헌적 절차다.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김우식 비서실장을 통해 퇴진하는 고건 총리에게 각료 제청권 행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 총리는 측근 인사들은 물론 일부 기자들과의 만남에서도 제청권을 행사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관운이 탁월한 관료, 행정 9단, 우유부단한 정치가 등의 평가를 받아온 고 총리의 선택으로서는 다소 의외지만,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한 그가 훗날을 위해서라도 ‘명예’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 한차례 총리 이름을 빌려준 아픔도 갖고 있지 않던가. YS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그는 1998년 DJ 정부가 들어서자, 물러 가기에 앞서 변칙 제청을 해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명한 김종필 총리 내정자가 국회의 임명동의 절차를 받지 못해 국정 파행이 거듭되는 상황이었다. 고 총리는 그 덕분(?)에 DJ의 지원으로 민주당 공천을 받아 한 차례 더 서울시장에 올랐다. 고 총리는 “국정 공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정부이양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자위했으나, 그 아픔을 두고두고 곱씹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한번만 더’를 부탁해야 하는 측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민노당에 의해 철새 정치인으로 찍힌(?) 김혁규 전 경남지사의 총리 인준이 예상 외로 어려워질 수 있으니 여권으로서는 쉽게 가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 새 총리에 대한 인준 절차가 빨라야 6월 말이나 돼야 끝나고 그 후 장관 임명제청을 받아 개각을 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최근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비롯, 이라크 파병, 고유가, 불황 등 현안이 첩첩이 쌓여 있을뿐더러 공직사회의 조기 안정을 위해서도 시간이 없다.

집권여당이 처한 형편과 심정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고 총리의 제정권 행사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한마디로 ‘변칙 제청’이기 때문이다. 총리의 제청권은 인준 절차를 거친 새 총리가 국무위원을 제청토록 행사하는 게 순리다. 총리공관을 떠나려는 사람더러 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국정을 이끌 지도 모르는 새 각료를 추천하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헌법상 보장된 총리의 제청권을 무력화하고, 총리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기존의 ‘제왕적 대통령’ 시각이나 다름없다. 참여정부가 그토록 부르짖어온 낡은 정치 청산, 책임 총리, 당정분리 원칙과도 배치된다.

아예 한술 더 떠, 권력 주변에서는 고 총리의 사표처리 후 총리직무대행(재경부총리)을 통해 제청권을 행사하도록 한다는 더욱 기막힌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힘없는 재경부총리에게 변칙의 총대를 메게 하자는 것인데, 물러가는 총리나 총리 직무대행이나 모두 각료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편법’일뿐이다. 합법이라고 우길 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참여정부가 그토록 파괴하고자 했던 낡은 정치의 관행에 나쁜 목록 하나를 덧붙이는 격이다. 편의주의적 발상도 이 정도면 군사정권 수준이다.

참여정부가 4ㆍ15 총선 승리 후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하려는 태도는 거꾸로 그만큼 오만해졌다는 뜻이다. 지난 1년 몇 개월동안 역대 정권이 모두 외면하는 가시밭길을 걸어 왔고, 성과도 어느 정도 거뒀으니 이젠 좀 편하게 빨리 목표를 향해 가자는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그게 불행의 씨앗이 된다. 역대 정권이 남긴 교훈이다.

개각이 왜 그렇게 급한가? 고 총리가 나가고, 김혁규 전지사가 들어오면 혼란에 빠진 경제, 사회체제가 하루 아침에 되살아 나는가? 경제는 이헌재 경제부장관에게 맡기고, 남북관계 및 주한미군 문제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돼야 할 사안이다. 실세이고 창당공신이고 간에, 유력한 차기감이라고 해서 검증없이 맡겨서는 곤란하다. 그런 발상 자체가 정권이 오만해지고 있다는 징후다.

입력시간 : 2004-05-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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