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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대통령의 고질병, 직설 화법 편애 신드롬


1999년 12월31일을 택해 전격 사임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연설을 처음 들은 것은 지금부터 10여년 전 모스크바 첫 취재를 갔을 때다.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TV 화면을 통해 투박하고 강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국내 TV에도 얼굴은 가끔 비춰졌으나 목소리는 ‘아직’이었다. ‘고르비! 고르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을 환호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옐친의 말은 굵고 세다. 또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고르바초프와는 대조적이다. 권력을 장악한 뒤로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면서 카리스마가 뚝뚝 돋는 듯했다.

80년 역사의 공산당 체제를 조금씩 허물어 간 고르바초프의 말은 유연하고 부드럽다. 공산당 대회나 최고회의(의회)에서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그는 때로는 조리있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말’로 개혁의 씨앗을 뿌렸다. 필요에 따라 ‘인간의 모습을 한 사회주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주의를 살찌우는 정책’이라는 등 명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의 연설은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인들로부터 ‘화려하나 공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로는 개혁과 변화를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개혁의 피로도만 높였다는 실망 섞인 반응이다. 언어학자들은 고르바초프의 말이 촌스런 코카서스 사투리(그는 남부 스타브로폴 출신이다)인데다 문법이 틀리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90년대 초반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연설에 대해 물어보면 “고르바초프의 말은 귀로 들리는데, 옐친은 가슴으로 들린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슴을 때리는 말로 옐친은 국민을 사로잡았고, 절망적인 쿠데타를 진압했으며 10년간 개혁의 화두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화려한 수사보다는 핵심을 직접 겨냥하는 화법을 구사하다 보니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말 실수도 잦았고, 말년에는 ‘너무 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KGB 출신으로 권좌에 오른 푸틴 대통령은 역대 러시아 지도자중 최고의 화술을 지녔다는 평이다. 현직 대통령이란 프리미엄을 감안하더라도 ‘회색 추기경’을 연상케 하는 굳은 표정에 딱딱한 분위기, 입을 열면 쇳소리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말솜씨가 돋보인다 한다. KGB 시절에 받은 ‘상대 설득하기’ 훈련 덕분이다. 대통령이 된 뒤 어휘 선택도 탁월하다. 예를 들면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는 “러시아는 새처럼 꼭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며 시적 표현을 썼다.

또 두뇌의 해외 유출로 고민하는 과학계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두뇌 유출이 있다는 것은 어쨌든 우리에게 (유출될) 두뇌가 있다는 얘기 아니냐”며 용기를 붇돋은 뒤 “힘을 내자”고 격려했다. 전문 번역가인 마이클 버디 같은 이는 “푸틴이 70%가 넘는 국민 지지도를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은 설득력 있는 말”이라고 분석한다.

언어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말솜씨가 좋아서 나쁠 건 없다. 참신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새 국정 방침을 국민에게 주입하는데 설득력 있는 대통령의 말은 꼭 필요하다. 대통령의 말투나 어법, 어휘 등은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 대통령이 엊그제 탄핵사태후 처음으로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변화의 시대, 새로운 리더십’이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직설적이고 핵심을 바로 찌르는 노 대통령 특유의 화법은 여전했고, 화제를 불렀다. “우리나라 복지 예산 세금 재정의 재분배 효과를 보면 한심하다”, “보수란 힘 센 사람이 좀 맘대로 하자 …그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다. 진보란 더불어 살자 …, 크게 봐서 이렇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 ‘가급적 바꾸지 말자’가 보수고 ‘고쳐 가며 살자’가 진보다”, “뻑하면 진보는 좌파고 좌파는 빨갱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다” 등.

감정을 담아 직설적으로 내뱉는 말투는 지지층을 환호하게 만들지만 반대층의 불안감을 높인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니 안티 세력도 늘 수밖에 없다. 구 체제나 관습을 하루빨리 제거하려는 노 대통령의 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목표가 과거의 분열을 극복하고 대화를 통한 상생의 문화를 만들자는 데 있다면, 공격적인 화법은 분명 그에 역행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노 대통령은 국민을 직접 상대하고픈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자극적인 어휘를 선택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유연한 고르바초프도 페레스트로이카 초기에 그랬고, 옐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과는 공허한 말로 끝났다.

역대 대통령과 다른 노무현식 직설화법은 아직도 일부 계층엔 충격적이다. 속이 시원하다는 국민도 없지 않지만 감정을 조절하지 않으니, 대통령 화법으로 너무 공격적이다. 게다가 더구나 뒤끝까지 공허하다면 감점이 아닐 수 없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4-06-0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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