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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 누에 고치의 꿈'…6ㆍ25는 말한다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은 한국인만의 역사가 아니다. 세계인에게 상기(想起)돼 회억(回憶)과 교훈을 던져주는 역사이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 1989년 6월 4일 발생한 베이징의 천안문 사태 진압을 주한ㆍ주중 미국 대사로 겪고 처리한 제임스 릴리(1928년 칭타오 출생)에게는 더욱 그렇다.

릴리는 1950년 6월 25일 미네소타 러쉬포트의 한 농장에서 트럭을 몰고 온 농장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 한국에 전쟁이 났다. 오늘 터졌다.” 당시 그는 예일대 영어 및 러시아문학 연구학부 3년생이었다. 그는 농장주로부터 “ 전쟁이 났으니 옥수수 값이 뛰겠지”라는 말을 들으며 “ 이 전쟁은 ‘ 나의 미래인 옥수수’에는 무엇을 안겨 줄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때 예일대는 소련의 공산주의, 그가 태어난 중국의 공산주의와 맞서기 위해서는 대학생은 CIA에 가서 복무해야 한다는 반공주의 여론이 높았다. 다분히 환상적이고, 비관적이며, 염세적이었던 그는 막냇동생 릴리에게 죽기 1주일 전 차분한 편지를 보냈다.

‘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자에게 미래가 있는 것 같다. 네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웨스터 포인트 사관학교에 가라. 그곳에서는 대학에서 경시하는 극기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릴리는 프랭크의 이런 편지는 그가 ‘너무 집착적이고 감정적이며 격정적인 것을 넘어서라. 낭만주의나 격렬한 감정을 넘어 사실에 입각해 사태를 보고 환상에 빠지지 말라”는 자기반성을 전한 것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CIA에 지원, 52년 11월에는 전쟁중인 서울에 와 북한지역에 특수 요원을 낙하산 투입하는 첩보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과 미국이 73년 개교할 때 베이징 연락사무소에 첫 CIA 주재관이 되고 제 2대 소장인 부시 H. W(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밑에서도 일했다. 그는 1986년 11월 서울에 미국 상원 청문회를 거쳐 그의 생애 첫번째로 미국대사가 됐다. 이에 앞서 중국과 개교로 국교가 비공식화된 대만에서 1982~86년까지 미국기업소장(비공식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난호에 쓴 것처럼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군부 사용을 억제시켰다. 전 전 태통령은 처음으로 87년 6월 24일 김영삼 야당총수를 만났고, 정국은 ‘6ㆍ29선언’을 향해 갔다. 그가 ‘ 6ㆍ25’ 37년째를 맞는 서울에서 “ 나는 한국에서 정부측과의 관계는 좋았다. 그러나 극렬한 학생들과는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릴리는 1989년 5월 12일 베이징 미국대사로 부임했다. 1919년 ‘ 5ㆍ4 혁명’의 70주년을 맞아 ‘ 신중국’을 외치며 후요방 총서기 추모제를 지내며 천안문에 몰려드는 학생 운동 인파를 보았다. 그 해 6월의 베이징은 ‘ 신중국’ 운동 주동자가 ‘반혁명분자’로 몰려 공적(公敵)이 되던 때였다.

중국 출신 첫 미국인 대사로 CIA에서 30여년이 지난 후 은퇴, 해안의 건너편 자유중국의 대사로, 그리고 서울을 거쳐 부시(H.W) 정부의 대사가 되어온 당시의 베이징은 너무나 서울과 달랐다. “ 베이징에서의 나는 서울과는 달리, 정부와의 관계가 험했다. 인민들은 반대로 미국을 지지하는데…”

그가 보기에 실질적 권력자인 등샤오핑은 천안문에 몰린 학생ㆍ시민의 민주주의 운동을 “ 중국 공산주의를 깨뜨리려는 반혁명이며 철저한 보복만이 해결책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에게는 6월 3일 저녁에는 무력진입이 천안문에 있을 것이다는 분석과 정보가 있었다. 이날 저녁의 탱크를 앞세운 군대진입은 대학원에서 연구한 그에게 중국인민은 전체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도 탱크를 막을 수 있다는 나름의 민족주의자들임을 실증 시켜주었다.

특히 천안문 사태를 일으킨 지식인 서명운동의 대표인 팡리지(方勵之) 천체물리학자가 미 대사관에 숨어 들어온 후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충돌직전이 됐다. 이런 관계는 87년 12월~90년 5월간에 미 대통령 특사의 두 차례 방문, 세계은행의 대부, 최혜국대우가 재개되자 서서히 풀렸다.

미국이 준 선물에 중국은 팡리지 부부와 그의 아들을 제 3국으로 추방하겠다고 화답했다. 석방일은 90년 6월 25일. 릴리에게 ‘옥수수’의 꿈을 키우게 한 날이다. 릴리는 대사관저 서쪽 중국측 경비가 있는 곳과 담을 맞댄 대사관 의료시설의 실험실에 팡 부부를 숨겼다. “ 저녁 식사 하러 왔다가 눌러 앉은” 손님처럼 부부는 1년여를 햇볕을 보지 못한 채 ‘ 누에고치’처럼 살았다.

릴리는 90년 6월 25일 팡 부부를 이삿짐 터럭에 태워 공항가지 동행해 영국 캠프릿지 연구생으로 그를 출국 시켰다. 릴리는 1990년 6월 25일 팡 부부를 이삿짐 트럭에 태워 공항 기지까지 동행, 영국의 캠비리지 연구소로 출국시켰다. 그는 회고하고 있다. “ 세상은 자유스러워져야 좋은 세상이요. 그게 6ㆍ25가 준 교훈이다”라고.

입력시간 : 2004-06-3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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