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미국 대통령과 국방장관


윤광웅 신임 국방부 장관은 7월 29일 “군에 대한 문민 통제 원칙을 선진국형으로 보다 확고히 굳히기 위해 국방부 본부 간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을 민간 출신 인사들로 단계적으로 교체할 것이다” 는 방침을 전했다. 개혁의 모델은 ‘문민 우위’ 가 통제의 원리인 미국의 국방부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국방부 장관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로버트 맥나라마는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때 국방장관을 7년 6개월 동안 지냈다. 6주가 채 안 된 포드 자동차 회사의 회장으로 46세였던 그는 60년 12월 어느날 면식이 없는 대통령 당선자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로부터 입각 권유를 받았다. 1살 아래인 케네디와 첫 대면한 그는 “국방장관에 나는 적합치 않다”고 사양했다. 케네디는 2차 대전 때 공군에 복무하며 공군력 증강에 경영적 방법을 도입한 이 하버드 MBA출신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니 자세히 설명해 주더라. 나는 그 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느꼈다. 대통령 자리나 국방장관 직에 대해서는 어떤 전문학교가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케네디는 며칠 후 그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정치적 이해나 정실에 기울어진 부처는 맡을 수 없다. 나는 내 부처를 내 자신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 그리고 인사권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케네디는 워싱턴 포스트지에 새 내각에는 맥나라마가 국방부 장관으로 유력하다고 흘렸다. 그는 이 직책을 역임하며 베트남 개입, 쿠바 미사일 미ㆍ소 대결의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그는 1963년의 10월 15일에 시작된 소련과의 ‘쿠바 중ㆍ장거리 핵무기 적재 가능한 중ㆍ장거리 미사일 배치’ 대결에서 ‘외과적 기습 폭격’, ‘쿠바 상륙’이라는 군부 강경책을 억누르고 대통령 편에 서서 협상, 외교, 해상봉쇄라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2001년 나온 그의 제2의 회고록 ‘윌슨 망령’에서 ‘쿠바 미사일 사태’ 는 케네디가 결단력과 도덕성을 갖고 해결한 21세기의 국제문제 해결의 전형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윌슨이 1차 대전 후 그의 이상주의, 도덕주의를 버리고 현실주의 주변에서 얼쩡거린 ‘망령’이 언제나 미국 대외정책을 흔들리게 했다며 냉전 이후 불필요한 핵무기는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이상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결론짓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이 쿠바 기습 폭격이나 상륙을 감행했을 때와 같는 무모한 시도는 일본이나 소련이 하는 일이요, 카인이란 악명을 눈썹 위에 새기는 짓이다. 핵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쿠바 기습 공격은 막아야 한다. 터키에 있는 주피터 미사일과 쿠바의 소련 미사일을 서로 폐기하는 대통령의 안은 올바른 것이다.’

그는 1968년 2월 존슨에게 사표를 내고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제 1회고록 ‘베트남의 비극적 교훈’(1995년)에서 “나는 해임됐는지 사임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대통령이 65년 통킹만 베트남 기습을 의회의 동의 없이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선언한 것은 잘못으로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맥나라마는 미국 국방장관직을 문민우위 원칙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한 주요 실천자여야 한다는 이상에 우선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나라마와는 다르게 국방장관직을 닉슨 말기(1973년 6월)와 포드 초기 때(1975년 10월) 수행한 제임스 슐레진저의 장관직에 대한 관점은 사뭇 다르다. 1974년 8월 9일 닉슨이 사임을 선언하기 직전인 7월말께 그는 합참 의장인 조지 브라운 공군대장을 불렀다.

“만약 하원이 대통령을 탄핵하고 상원의 심의가 지속되어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되면 대통령은 우리(각군과 국방부) 몰래 어떤 군사조직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정상적 절차라면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모든 군령은 국방장관을 통해 내려진다. 나는 이 명령을 2분 내에 받을 수 있고 30초 안에 장관 앞에 설 수 있다.”

브라운 의장은 각군 참모총장을 불러 테이블에 올린 손을 벌벌 떨며 슐레진저 장관의 지침을 내렸다. “ ‘앞으로 각군 참모총장의 전원합의 없이는 어떤 군사행동이나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는 것이 국방장관이 방금 내린 지침이다.”40여 년을 군에서 복무한 5명의 합참위원인 4군 참모총장과 의장은 “쿠데타가 있을 수 없다” 는 장관의 지침에 ‘올바른 결정’이라고 모두 동의했다.

미국의 국가안보법에는 “대통령은 모든 군사작전 명령을 국방장관을 통해 행한다. 장관을 합참의장을 통해 각군에 알린다”고 되어 있다. 슐레진저는 1999년 ‘권력의 오만-리차드 닉슨의 비밀세계’의 저자와 가진 인터뷰에?밝혔다. “헌법과 법이 정한 국방장관의 권한에 대해 누구도 이론이 없었다. 내가 새삼 이를 확인한 것은 어떤 우둔한 자도 잘못 생각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내가 잠시 CIA국장(73년 2월부터 3개월간)으로 있을 때 나는 닉슨 대통령이 너무나 케네디 대통령의 실패(제1차 쿠바 상륙 작전인 ‘피그만 사건’) 의 뒷면을 알려고 하는 ‘강박 관념’에 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술을 많이 들거나 어떤 일에 몰두하면 그는 사람도 못 알아 본다.”슐레진저는 학생소요 때문에 워싱턴 주변에 이동한 82공정사단, 워싱턴 근교 공군기지 등에 백악관의 모든 지시는 장관과 합참에 즉시 보고토록 명령을 내렸다.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닉슨은 회고록 ‘정치라는 전투장에서 - 승리, 패배 재생의 회고록’에서 슐레진저를 “거칠지만 박력 있고 사심 없는 능력 있는 장관”이라 평했다.

슐레진저는 국방장관의 첫째 임무가 군령권을 갖는 것임을 확인해 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 문민우위의, 문민통제의 국방부와 장관을 갖기 위해서는 맥나라마와 슐레진저를 재고찰 해 볼 필요가 있다.

입력시간 : 2004-08-0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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