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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존 허시의 ‘히로시마’


‘1945년 8월 6일 상오 8시 15분. 일본 동아 주석회사의 인사계 여직원 사사끼 도시꼬는 회사 도서관 걸상에 앉아 창 밖을 쳐다 봤다. 눈을 감게 만드는 너무나 밝은 빛. 그것을 본 수간 뒷편의 책장이 넘어져 그녀를 덮치고 지붕이 내려 앉았다. “원자탄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그 때에 한인간이 책 더미 속에 묻힌 것이다.’21세기를 맞아 1999년 뉴욕대학 언론학부가 선정한 ‘100대 언론저서’에서 1위를 차지한 ‘히로시마’의 필자 존 허시(1914~1993)는 그 책에서 그렇게 썼다.

그는 ‘타임’, ‘라이프’지(紙)의 유럽, 태평양 전쟁에 종군한 소설가이며 기자였다. 그는 1945년 풀리쳐상 소설부분에서 시칠리 전쟁을 다룬 ‘아다노를 위한 조종’으로 수상했다. 중국 텐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36년 예일대 어문학부를 나와 1930년대 미국의 암울을 쓴 ‘메인 스트리트’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비서이기도 했다.

‘뉴요커’지가 ‘원폭 1년 후’를 기획하며 그를 지목 했을 때 그는 중국의 내전을 취재 중이었다. ‘뉴요커’의 윌리엄 쇼운 편집장은 상하이의 그에게 전문을 보냈다. “수 백만 단어가 원자탄 자체에 대해서 쓰여졌다. 히로시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무시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기획물이 훌륭한 결과를 가져 오리라 믿는다. 아무도 히로시마의 8월 6일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시는 1946년 3월부터 3개월 동안 히로시마에 머물며 사사끼 양을 비롯, 목사, 독일인 신부, 의사 2명, 재봉사인 한 중년 부인 등 모두 6명의 원폭 생존자의 삶을 추적했다. 3만자에 달하는 1945년 8월 6일에서 9일까지의 그의 삶은 원자탄보다 더 큰 충격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8월 31일자에 모든 광고, 기고, 논설, 기사, 그림없이 허시의 기사만을 싣는 ‘뉴요커’는 원폭급 폭파력을 발휘했다. 뉴욕 타임스는 1면 톱으로 뉴요커의 기사게재 방법에 대해 썼고, ABC방송은 드라마화 하지 않고 허시의 기사를 4개월간 방송했다. 책으로 나오자 손바닥만한 크기의 90쪽자리 책은 300만부가 팔려 나갔다.

허쉬는 기사에서나 책에서 폭탄의 투하 이유, 제조 과정 그리고 이것이 냉전과 미ㆍ소의 대결에 준 영향을 무시했다. 그는 투하 40주년을 맞아 1985년 후기 60쪽을 추가하면서도 6인의 삶만을 다뤘다.

‘후기’에 나와 있듯, 사사끼양은 도미니크의 수녀가 되고 양로원장이 되어 ‘원폭 후 40년’을 회고했다. 히로시마에서 격동의 전후 40년을 상징하듯.

책 더미 속에서 왼쪽 다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골절상을 입고, 방사선을 쬐는 순간의 피부 접촉으로 그녀는 3일간을 혼수 상태로 있었다. 다리를 심하게 절며 병상에서 일어섰다. 전후에 돌아 온 약혼자는 ‘나비’그림을 보내 “결혼할 마음이 흔들거림”을 알렸다.그녀는 세 차례의 대수술 끝에 비로소 걷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원폭직후 한 달여 동안 2번은 배(船)로 육군병원 등에 내동댕이 쳐졌고, 9월 9일에야 적십자 병원의 침상에 누울 수 있었다.

이날에야 그녀는 히로시마의 중앙통을 들것에 실려서 볼 수 있었다. “폭탄이 꽃씨를 뿌린 듯 폐허의 쓰레기 더미 사이에 벼가 패고 하얀 국화꽃이 피었다. 식클센나(잎이 날카롭고 오색의 꽃이 피는 풀)가 대로에 가지런했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는 폭탄에 죽었고 남동생 하나만 살아 남았다. 당시 22살인 그녀는 동생을 위해 부모가 준 유산을 관리하며 경리 및 부기 학원에 다녔다. 49년에 자격증을 따자 그녀는 주일 미군의 혼혈 자녀 40명을 수용하는 고아원의 책임자가 된다.

이 고아원은 미군과 ‘양공주’사이의 혼혈아가 태반이었다. 20세를 갓 넘긴 미군 아버지들이 부대를 이탈해 아이를 보러 오고, 어머니들이 눈물 지으며 헤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원폭의 잔혹성을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보고 희생된 미군, 중국의 청년들의 증오도 생각해야 한다. 원자 폭탄이 전쟁의 수단이라는 면만 생각할 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원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부터 찾아 왔던, 그 또한 피폭자였던 독일인 신부는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권했다. 이미 먼발치에서 약혼자를 본 그녀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다만 절뚝거리는 다리로 병원 앞 벼랑에 서서 햇볕에 반짝이는 대나무 잎새를 쳐다보다 숨이 막힐듯한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사사끼 양은 1957년 도미니크 수녀가 되었다. 33살에 양로원장이 되고 1970藪〈?로마 교황청에서 열린 양로원장 세계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78년 55세의 나이로 수녀에서 은퇴한 그녀는 일본의 세계조력협회 감독, 시골대학 사감으로 지내며 원폭 40주년에 찾은 허시에게 담담히 말했다.

“나는 과거에 묻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원폭으로 살아나 잉여의 인생을 살아 온 것입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렵니다. 나는 앞만 보고 나가겠습니다.”

허시는 1965년부터 예일대 어문학부 교수로 일했다. 그의 죽음을 앞두고 ‘트루먼’ 평전을 썼던 데이비드 맥컬러우(예일대 55년 졸)는 말했다. “아주 드물게도 그는 우리 시대를 예술적 감각으로, 폭 넓게 그렸다. 그는 우리의 서가에 20세기의 위대한 작품을 꽂을 수 있게 했다.” 그에게 ‘히로시마’는 작품의 대상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생한 삶을 담은 기사(記事)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입력시간 : 2004-08-1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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