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이만섭의 '처음', '첫번째'


“정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욕먹는 게 낫다.” “노무현 대통령을 닮아 돌출발언을 한다고들 하는데, 이는 대표를 얼굴마담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9월 23일 기자간담회에서 수도권 이전, 국가보안법 등 최근 현안에 대해 당내에서 ‘리더십 부재에 따른 현상’으로 해석하는데 대해 한 말이다.

“정치와 사람은 계산으로 하면 안 된다.” “정치는 꾀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정치는 장사가 아니다. 계산을 너무 오래 하면 안 된다.” 지난 9월 9일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이 발표된 날, 14ㆍ16대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72)씨는 이날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이승만에서 노무현까지-파란만장의 가시밭길을 헤치며’라는 회고록의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8선의 이 전의장은 김수한 김재순 박관용 정내혁 채문식 등 5명의 전 국회의장들이 ‘시국선언문’ 서명자 첫머리에 그 이름이 올랐지만 서명을 하지 않았다.

“왜 서명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그의 회고록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표가 ‘정치란…’, ‘정치는…’이란 의문에 대해 좀 더 알려면 그의 회고록을 읽든지 그와 대화를 가졌으면 한다.

6백쪽이 넘는 이 책은 1956~1963년까지 동아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로 있었던 그가 “나는 이 회고록을 직접 내 손으로 썼다”고 적었다. 회고록의 서술 방식은 여느 정치인들의 회고록과는 달리 용어ㆍ 언어 선택에 감상(感傷)을 배제해 절제되고 객관적이다.

기자로서의 그의 이력은 짧지만 그는 객관적인 정치부 기자가 기사 쓰듯 이 회고록을 썼다. 아마 현재 기자들이 그의 밑에서 수습을 했다면 혼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는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결론 지은 이 회고록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국민을 위해’와 ‘나라를 위해’‘민족자주’ ‘민족정기’‘평생 정치인’ 등이다.

그의 책에는 연세대 응원단장, ‘털보’로 19~57년 신촌 캠퍼스에 알려졌던 ‘돈키호테’적, 낭만, 영웅적 호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기록에 도전하는 육상선수 같은 ‘첫 째’‘최초’‘초유’가 되려는 확실한 기록이 있다.

그의 첫번째 자랑(?)은 1962년 가을 어느날. “박정희 의장과의 단독회견이 5ㆍ16후 내외신 기자를 통틀어 그날 자신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박 의장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이맹기 해군 참모통장, 민기식 1군사령관 등과 함께 순시에 나섰다. 배 안에서 박 의장과 이만섭(동아일보) 기자는 설전을 벌였다.

“그런데 요즘 신문이 문제야, 특히 동아일보가 문제란 말이요. 신문은 선동만 해요. 쌀값이 오르면 톱으로 ‘쌀쌀, 쌀값폭등’하고 주먹만한 활자로 보도하니 쌀값이 오르지 않소…. 신문이 그렇게 선동해서야 되겠어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쌀값이 오르면 위정자들이 그런 현실을 알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지. 결코 선동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전에 제가 사실보도(61년 6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의 민정이양 촉구 회견)때문에 육군 교도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이야기 한 걸 그대로 보도 했는데도 잡혀갔습니다. 혁명정부의 언론정책과 시각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뭔가 문제가 있구만.” 그는 박 의장과 배 안의 대화에서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나라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기어이 이루겠다는 굳은 신념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는 혁명정부의 정치 스케줄과 선거 일정 등을 특종 보도했다. 그는 “서민의 사정을 잘 모르는 귀족 출신의 윤 전 대통령보다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과 서민의 고통을 잘 아는 박정희 후보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는 63년 추석 밤에 보름달을 본 후 기자 생활을 접었다. 그는 박 후보의 선거 유세반 첫 연설자가 되었다. 그의 찬조연설은 대구ㆍ부산에서 인기를 끌었고 윤 후보에게 150여만표 차로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31세 나이에 그의 정치인생은 시작한다. 처음으로 공화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것이었다.

이만섭 전 의원의 ‘처음’, ‘첫번째’ 찾기의 정치인생은 64년 10월 9일 ‘남ㆍ북 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처음으로 제출하기에 이른다. 도쿄 올림픽에서 북한의 신금단 육상선수와 한국으로 남하한 신문준 아버지가 상봉하는 것을 보고서였다.

대구에서 출마해 2선 의원이 된 그는 3선 개헌에 나선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설득에 나선 뭐枰?의원이 되었다. 69년 6월 29일 무더운 날이었다. 그는 3선을 해야 한다는 박 정 대통령의 인간적 회유에 맞섰다. “저는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면 두 가지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평화적인 정권교체’입니다. 그건 반드시 야당에게 정권을 넘겨준다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결코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치보복’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평화적 정권교체’ ‘정치보복’을 그가 처음으로 썼다.

박 전 대통령은 10월 17일 개헌안 통과 후 10년이 지나 피격사망까지 그를 청와대로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회고한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에 역행했던 양면성을 지녔던 게 사실이다. 박 대통령이 ‘3선 개헌만 하지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84년 2월 29일 ‘국민의 당’ 대표연설을 국회에서 할 때 처음으로 문민정부라는 말을 썼다. “…이 나라에 참다운 도덕적 민주정치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문민정치’가 확립돼야 합니다.”

박근혜 대표는 이회장 전 총재를 만나기 전에 이만섭 전 의장을 만나야 했다. 꼭 충고 직언을 듣는게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 2004-10-0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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