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케리의 '완벽한 전기'


마지막 대선 후보 토론을 마친 이튿날(14일) 워싱턴 포스트의 일일 지지도는 부시와 케리 후보가 48%로 같았다. 토론회 하루 전에 발표된 지지도는 49%의 지지도로 부시를 1% 앞질렀다.

이 신문의 대표적인 정치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러더는 토론 현장을 직접 뛰며 세 차례의 토론을 이렇게 요약했다. “ 수십년간 다투어 온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국내 및 국제)에 대한 차이가 토론에서 다시 드러났다. 두 후보는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그들의 정책을 명백히 했다. 지지자들은 듣고 싶은 말을 확실히 했다.”

모두 4시간 30분간에 걸친 세 차례의 토론 중 두 후보의 아내인, ‘ 센 여자’에 대한 답변은 4분에 그칠 정도로 토론은 딱딱했다. 그러나 부시가 “ 로라가 토론 때 똑바로 서고 얼굴을 찡그리지 말라고 했다”고 하자 웃음이 터졌다. 케리는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답했다. “ 부시와 나는 훌륭한 결혼을 한 운 좋은 사람이다. 아마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운 좋은 사람이다”며 하인즈 케첩의 상속여인이 된 부인 테레사 하인즈 쪽을 쳐다봤다. 카메라를 토론 약정을 깨고 하인즈를 비췄지만 그녀는 담담했다.

브러더는 결론 내렸다. “ 이 장면은 대선 토론에서 가장 부족한 웃음을 찾아 내게 하려는 경박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번 토론에서 부각 된 것은 케리가 ‘ 왔다 갔다’하는 식의 쇼적 정견을 버리고 문제를 간결하고 가볍게 처리한 점이다.” 케리가 세 차례 토론에서 성공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도대체 케리는 어떤 ‘인격자’이기에 10%로 뒤진 지지도를 박빙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지난 4월말에 나온 보스턴 글로브지의 마이클 클래니스 등 세 명의 기자가 쓴 ‘존 F. 케리 – 완벽한 전기(傳記)’에서 찾아본다.

이 신문의 편집장인 마틴 베론은 발간사에서 밝히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와 존 케리의 관계에는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다. 케리가 직접 또는 대리인을 통해서 본지가 부당하게 그의 뒤를 캐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전해 온 적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서평에서 “1992년 워싱턴 포스트에 빌 클린턴에 대한 내용보다 훨씬 냉혹하고 가차없이 씌어졌다. …매사추세츠주의 사람이 아닌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매사추세츠주의 정치 세계를 아주 자세히 알 수 있다. 또한 존 케리가 신참자에서 어떻게 능숙한 정치가로 변해 갔는지도 알 수 있다”라고 평했다. 베론은 “ 이번에 출간하는 케리의 전기는 균형 잡힌 시각과 신뢰할만한 취재에 의거한 결정판”이라고 자부했다. 베스트 셀러에는 들지 않았지만 이 책은 아마존닷컴에서 1만3,000천여부가 팔려 나갔다.

존 케리는 1943년 12월 11일 리차드 케리(1915~2001)의 장남으로 보스턴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리차드는 예일대 출신의 해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참전하려다 의병 제대했다. 그후 변호사를 거쳐 유엔, 베를린 대사관에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외교가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냉전을 수정주의 입장에서 보는 학자에 속한다고 한다.

‘완벽한 전기’에는 케리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진보,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미 동부의 명문인 존 포브스가와 핏줄이 닿은 어머니, 마가렛트 덕분에 ‘귀족적’이라고 밝혀 놓고 있다. 케리가 “ 나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느낀 것은 고등학교 때인 1960년 11월 7일에 케네디의 연설을 들은 후 였다. “ 이번 선거는 두 정당이나 두 후보사이의 경쟁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들과 미국의 미래를 우려하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다. 안전한 곳에 앉아 거짓말하는 사람들과 진보를 위해 전진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다.”

62년 9월, 케리는 재클린 여사의 이복 동생인 여자 친구를 통해 대통령이 된 케네디를 그의 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되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64년 졸업을 앞두고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었던 PT정 정장 케네디를 따라 해군장교가 되기로 했다. 그때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 내 꿈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이다.”

‘ 완벽한 전기’에는 케리가 2002년 12월 4일 연방선거 위원회에 대통령후보로 등록하기까지, 40여년의 세월이 적혀있다. 이 책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려 “ 케리 특유의 에둘러 말하는 완곡한 어법”, “ 중요한 사안에 심사숙고하는 성격”, “ 주특기는 양다리 걸치기”, “ 갈짓자 행보”, “ 여전히 확신이 없었고 흔들리고 있는 듯 보였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썼다. 바로, 부시 대통령이 “이 말하고 저 말하는 사람”으로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대표적인 갈짓자 행보의 예로 ‘ 완벽한 전기’에서는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시 했던 말을 들었다. “ 미국은 우리 군을 위해 단결할 필요가 있다”며 이라크 섬멸을 옹호한 것이다. 그 1주일 후, 그는 ‘ 말’의 행보를 바꾼다. “ 지금 필요한 것은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미국의 정권 교체다.” 그러나 그를 추적한 보스턴 글로브의 세 기자는 소크라테스 같은 사고와 시적 감성을 지닌 그가 대선 자금 모금이라는 실용적 측면에서는 ‘마지막 질주가 장기인 후보’라고 결론 내렸다.

1999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나설 것을 포기하며 그는 시 같은 고백을 했다. “ 내 마음은 전투를 사랑한다. 내 마음은 이 일을 사랑한다. 내 마음은 이 일을 위해 나가 싸우라고 말한다. 어젯밤 내 머리는 열 달 안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모금해야 하는 데 바쳐졌다.” 케리는 그 때 고어 부통령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 엄청난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4년 대선 예선에서 그는 막판 스퍼트로 후보가 되었다.

케리는 48%대 48%의 똑 같은 선에서 스퍼트할까. 뉴욕 타임스의 선거 전문기자 토드 프럼은 “ 미국 현역 대통령은 큰 차이로 졌으면 졌지, 근소한 차로 이기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케리가 근소의 차이로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다.

입력시간 : 2004-10-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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