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1백년전의 고종


꼭 1백년 전, 1905년 1월의 서울은 2005년 1월보다 무척 추웠다. 저 멀리 대서양, 태평양을 건너 북유럽 스웨덴에서 서울에 온 필명 아손 그렙스트 기자(본명 윌리엄 안데르슨 그렙스트)는 그 해 11월 을사조약으로 왕권을 잃게되는 고종을 1월 5일 알현했다.

그렙스트 기자는 스웨덴의 외교를 대리했던 주한 독일 공사의 도움을 받아스웨덴의 고위 장군으로 위장, 태자 순종의 비(妃)인 순명황후의 장례식에 참석 한 것이다. 그는 “살아 생전에는 다시 볼 수 없을 진경”을 보면서 외교 사절을 맞아 악수하는 고종 황제와 태자를 살펴봤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은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조그마한 눈은 상냥해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의 시선은 한 곳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노상 허공을 헤맸다. 성긴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지만 노란색 옷차림에 서양의 나이트 캡과 비슷한 높은 모자를 쓴 모습이 마치 상냥한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그는 느낀대로 썼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고, 평양 인천 뤼순항에서 러ㆍ일 전쟁이 격화하자 그렙스트는 이 전쟁을 취재하러 도쿄에 온다. 하지만 일본의 전투지역 종군 금지 조치 때문에 영국 직물 상인으로 위장해 서울에 왔다. 1904년 12월 25일 도착한 그는 여러 곳을 둘러 보며 “이 나라는 결국 일본에 점령된다”는 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고종은 그에게 물었다. “장군으로서 조선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조선 군대의 질서 정연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신 지고한 황제 폐하이자 조선 군대의 대원수를 고국에 돌아가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고종과의 짧은 만남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외교관들이 조의를 표할 때마다 황제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굽히곤 했었는데, 내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황제에 대한 이미지와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한 많은 황제에게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장례식 날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평상시에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1905년 1월 5일, 이 날은 일본이 극동의 지브럴터라고 부르는 뤼순(여순)항에서 발틱 함대를 완전히 몰아낸 것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고종에 대한 ‘연민’은 일본의 조선 병합에 대한 한 스웨덴 기자의 가슴 아픔이었다.

고종은 1907년 7월 순종에게 양위했다. 그렙스트는 1912년 ‘을사조약 전야 대한민국 여행기’를 스웨덴에서 펴 냈다. 그가 본 것은 고종의 정치적인 면보다 인상기였다. 그의 알현기는 기자의 눈, 세계인을 자처하는 여행가로서의 느낌을 적은 것이다.

고종의 인상은 그 후 사뭇 다르게 자랐다.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 낭인 쿠테타군의 일원이었던 한성신보 기자 기꾸치 겐조의 고종에 대한 인상은 무척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다.

기꾸치는 1930~1935까지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고종, 순종 황제 실록 편찬 위원에 위촉 받았다. 그는 1936년 ‘근대 조선사(상)’(669쪽)을 냈다. 그는 ‘고종 친정(1873년 12월)’의 대목에서 고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총명한 청년 국왕은 강의(剛毅) 과단에 있어서는 그 아버지 대원군에 미치지 못하고 관화중후(寬和重厚)는 그 형 이재면만 못하고 인자순정(仁慈 純精)은 그 할아버지 순조에 떨어질지라도 신하를 조종하고 민심을 수람하고 응대 접우에 관해서는 일찍이 청년시대부터 절묘를 극했으며, 제도 문물의 고찰에 이르러서는 이씨 왕조 26대 중 고종을 제 1등으로 한다. 이를 선고(先考)대왕의 열에 대해서 그 비교를 구하면 세조의 기우(氣宇:마음의 넓이)와 영조의 성정(性情)을 겸한 역대에 드물게 보는 명군이었다. 불행히도 강대국이 포위한 사이에 처해 외교를 오로지하여 내정의 통제는 잘 정하지 못하여 그 치세 50년간 몇 번이나 국제당화(나라끼리 무리지어 다툼)에 휩쓸려 국세를 끝내 세울 수 없게 되었음은 애석하다.”그렙스트가 고종을 알현한 지 31년이 지난 후 나온 고종에 대한 평가는 고종에 대한 인식이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그렙스트 알현 92년 후인 1997년에 쓴 ‘고종 황제 암약설(暗弱說) 비판’ 논문(‘고종시대의 재조명’中 -2002년 8월 刊)에 이르면 고종은 일본의 관치, 우익 사학계가 왜곡한 ‘명군’으로 나타난다.

이 교수는 고종이 ‘암약하다’는 평가는 ‘유약하다’, ‘암우(暗愚)하다’는 말의 합성이라고 보고 있다. ‘암우하다’?표현은 고종이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물러날 때 인본의 퇴위 강요를 정당화 한 마이니치 서울지국 기자 나라사키가 쓴 것이다.

나라사키는 1907년에 낸 ‘한국 정미 정변사’에서 암주(暗主), 암우(暗愚)를 썼다. “이번 정변에 대한 일본의 조치에 이르러서는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비난할 것이 없다는 것은 세계 열강이 인식하는 바로서 공평 명식(明識)한 천하의 평론은 일본의 요구를 정당한 것이라하고 한제(韓帝:고종)의 경거(헤이그 밀사 파견)가 스스로 이 화기를 만든 것의 ‘암우’를 조(弔)할 뿐이다”고 썼다.

이 교수는 결론 내리고 있다. “‘암약’, ‘암우’ 등 암군(暗君)설은 개인 인물평이 아니라 한 나라의 주권해체 명분론으로 내세워진 것으로, 그 이면에 고종 시대의 통치 제도와 그 정치적 목표에 대한 파괴 작업이 숨겨져 있다.”

1905년 1월 5일 그렘스트가 본 고종의 인상은 1백여년이 흘러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에서 ‘명군’, ‘암군’으로 변했다. 1백년이 흐르면서 우리는 이승만에서 노무현까지의 역사를 다룬 아손 그렙스트의 책(‘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을 읽으며, 보며 다시 감회에 젖는다.

입력시간 : 2005-01-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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