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과 현대사회] 일본의 망언과 드라마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그 날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는 일본대사관 앞 뿐 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이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 장면이 화면을 가득하게 채웠다. 대사관 진입을 시도하거나 화형식을 벌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배를 긋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엽기적인 피의 행진이 이어진다.

울분과 애국심의 표현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는 것이 과연 독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의문도 들지만, 이번 일은 그 동안 일본 우익들이 벌여온 지속적인 도발의 결정판 격이어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본의 왜곡과 망언이 나올 때마다 벌어지는 규탄 시위와 항의 집회를 볼 때마다 왠지 답답하고 막막해 지는 느낌이 든다. ‘언제까지 이런 성과 없는 반복이 이어질 것인가’, ‘진실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후안무치는 이런 방식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흔히 비교하는 독일처럼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하게 만드는 길은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개인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단어가 있다. ‘홀로코스트’다. 반일 집회를 보면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상기하는 이유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희생과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우리의 희생이 본질적인 내용은 같지만 현재적 구도는 판이하기 때문이다. 독일 대통령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스라엘 의회에서 공식적인 사과도 하는데, 일본은 적반하장이다.

같은 내용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와 일본 정부의 태도가 이렇게 정반대인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탓하는 이도 있고, 전후 일본 복구 과정에서 미군정이 보여 준 역할에 주목하는 이도 있다. 모두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점은 없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의 부당함과 포악함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는 데는 정치나 외교적 방법보다는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접근이 효율적일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나치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서 보다는 숱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더욱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보아 왔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머리 깊숙이 각인시켜 오지 않았던가.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보며 유대인의 희생에 가슴 아파했고, 발가벗겨진 유대인들 머리위로 독가스가 내려오던 장면이 너무나 사실적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보며 치를 떨었다. 조지 스티븐스의 ‘안네 프랑크의 일기’와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를 통해서는 나치의 만행에 대비되는 유대인의 선량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잘 알듯이 이런 영화들은 미국의 금융권과 영화판을 장악한 유대인의 막대한 자금이 동원된 결과물이다. 노엄 촘스키 교수 등이 ‘비극을 모독적으로 활용한다’며 비난하는 ‘홀로코스트 산업’의 성과물인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상술을 지금 따지자는 게 아니다. 우리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한일병합 이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36년의 세월은 얼마나 많은 절절한 사연과 극적이고 감동적인 삶들이 농축돼 있는 이야기 밭이며, 또 얼마나 많은 영웅적이고 인물들의 보물 창고인가. 그런데도 우리에게 아직 ‘한국판 홀로코스트’와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가 없는 것은 아쉬움을 넘어서는, 역사적 책무 방기는 아닐까?

‘다케시마의 날’ 제정에 반대해 배를 가르고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이 가득한 텔레비전 뉴스가 끝난 뒤에, 드라마가 이어진다. 출생의 비밀이 얽히고 설키는 재벌 시댁의 구박에 눈물짓는 신데렐라, 눈 먼 아름다운 여자의 비극, 형제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 여인의 한숨 따위가 가득한 드라마들의 행진을 보는 마음이 불편해져 온다.

김종욱 CBS PD


입력시간 : 2005-03-22 15:37


김종욱 CBS PD networking62@chol.com